위천면 강천리 산174번지 마항마을 뒤 수염산에 있다. 문질공 이예(文質公李芮)의 7세손 이여관(李汝寬)이하 삼세오위를 제사 지내는 단이다. 삼세오위는 상위에 군자감참봉 이여관(李汝寬)과 숙인 김해김씨 다음이 통정 이청소(李淸素)와 숙인 전주이씨 삼세째 맏이 이계희(李繼禧)와 유인 전주이씨 가운데가 가선 이계운(李繼雲)과 정부인 진양하씨 셋째가 이계형(李繼亨)과 유인 창녕성씨이다. 서기1955년에 의성인 문소김황(聞韶金榥)이 단비기문을 지었고 초계인 정해균(鄭海均)이 글씨를 썼다.
역문
합천이씨삼세묘제단비
옛 안의(安義)고을에서 북쪽으로 삼십리 가량되는 금원산 동쪽 마항촌의 북편 기슭에 합천이씨 세장으로 10기의 묘소가 벌려져 있으며 가히 식별하지 못하고 후대에 계속하여 순례에 따라서 첨소의 예절을 닦아오다가 그 묘역 남쪽으로 한 대석 앞에 나가 차례로 설위하고 세일제 지내기를 오직 삼갔으니 대개 부득이한 일이다. 그 제사 지내는 가장 상위는 이르되 군자감참봉부군 비위 숙인 김해김씨이며 그 다음은 이르되 통정대부부군과 비위 숙인 전주이씨이며 또 그 다음은 이르되 학생부군과 비위 유인 전주이씨이며 이르되 가선대부부군과 비위 정부인 진양하씨이며 이르되 학생부군과 비위 유인 창녕성씨니 무릇 이 오위가 세대로는 삼대가 되고 그 비위를 합하면 묘위는 십수에 해당한다. 보첩으로써 고증하여 보면 그 묘소가 되는 것은 적실함을 알 수가 있다. 이에서 다시 서로 더불어 의논하기를 세일사를 이미 폐지하지 못한즉 단소를 창설하여 진열함이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이만 같지 못할 것이라 하고 이미 설단을 하였은즉 또 가히 그 사실을 기록하여 먼 세대에 보여주어야 한다 하고 논의가 이미 확정되매 나를 찾아와 가부를 묻고 가하거든 글을 지어 달라 하니 내가 이르되 묘상에 제사지냄은 체백에
보답함이고 묘소가 분명하지 못한즉 제사 지내기란 또 무어라 이를 수는 없으나 그러나 이미 이 할아버지 묘소가 여기인줄을 명백히 안다면 혼백이 여기에 있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어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묘소에 제사를 지낸다 하여도 각각 축문에 호칭하지 못한즉 단설하여 합하고 차례대로 위차를 정하여 그 지극함을 구하는 것이 가히 예절의 술법이라 이르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 그 말에 의하여 이와 같이 쓴 것이다. 이씨의 선계는 신라에 강양군 휘 개(開)에서 나왔고 고려시대에 문질공 휘 예(芮)가 있어서 안의현 강동에서 살음에 호를 강천선생이라 칭하였다. 칠세를 내려와 참봉 여관 자(字) 수지에 이르렀으며 통정 휘 청소 자는 순녀는 그 자(子)라, 학생 휘 계희요 자(字)는 형숙 가선 휘 계운 자(字)는 운숙 학생 휘 계형의 자(字)는 미상이며 그 삼자이니 즉 위에서 칭한바 삼세에 오위라고 한자가 이분들이고 지금 나에게 글을 청하는 자는 참봉의 십이세손 형기이며 이 일을 건설하고 주관한자는 문기 애기 봉기 상만이라 한다. 내가 이미 기록하기를 다하고 뒤에 제사 지낼 적에 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사사를 지어 하여금 비석 후면에 새기도록 하였으니 축사에 이르되 기서가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시기를 당하니 초목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구려. 따라서 보본하기를 생각하니 예절을 감히 잊지 못하여 해마다 세일제를 올리었네. 적합한 제도가 여기에 존재하였으매 재계하고 달려왔네. 같은 자손으로 체백을 떠났으니 신도는 합하여 거의 간격이 없으리니 감응하고 모이고 길러서 자라남을 금원산에서 보겠네.
창령조씨 제단
을미 1955년 12월 하순에 문음 김황(金榥)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