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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비판(碑版)
   
6. 동계 정선생 신도비
  문강공 동계 정온의 신도비로 선생의 묘소가 있는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 용천정사의 뜰에 있으며 용주 조동이 글을 지었다.  원래의 비가 수해에 파손되어 다시 세웠다.







역문

동계 정선생 신도비명

동계 정공이 졸하여 장례와 상을 치룬지 몇 해가 지나서 그의 아들인 전 현감 창시(昌詩)군이 안음으로부터 홍양(洪陽)까지 해상 육백리 먼 길을 찾아왔다. 가장(家狀) 한권을 나에게 주면서 눈시울을 적시며 말하기를 선인의 묘목이 아름이 되도록 세월이 흘렀습니다. 불초제가 밤낮으로 선고를 생각하면서 묘비를 세울 준비를 해왔습니다. 그 불후의 글을 감히 선생께 부탁하오니 명을 지어 주옵소서! 하고 간청함에 내가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선군자의 비문을 짓겠는가? 자네의 선군자는 서기1613년 영창대군 처형 반대상소 사건과 서기1637년 강화도 함락의 울분을 못 이겨 자결을 기도한 사건 등 국인들의 이목에 혁혁한 충절이 남아 있는 분일뿐 만 아니라 하물며 수신제가의 학문으로 집안을 화목하게 다스리면서 높은 학덕을 일생의 근본으로 삼아 빛나는 업적을 남긴 자취의 서술을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앞으로 사관이 선공의 큰 업적을 사책에 기록할 것이고 전국의 서상숙이나 향례에서도 많은 행적이 남을 것인데 내가 어찌 못하는 글 솜씨로 그사이에 끼어 공의 찬란한 자취를 흐리게 하겠는가? 자네가 신중히 생각해 보구려! 하니 창시가 울면서 다시 말하기를 제가 선친을 위하여 할일은 오직 이일뿐 입니다. 선생님을 제쳐 두고 누구에게 이를 부탁하겠습니까? 하고 애원하였다. 이에 나도 마음이 아파 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고 조심스레 행장을 펼쳐보았다. 공의 휘는 온이오 자는 휘 원이요 성은 정씨니 집은 안음리에 있으며 자호는 동계이다. 그 선대는 초계로부터 나왔으며 고려조의 시중 배걸이 들난 분이었다. 배걸의 후 사세 습인은 벼슬이 좌산기상시이니 방정한 품행으로 유명하다고 문정공 이색이 전한다. 그 아들 전은 문학이 당시에 최고였으니 세칭 팔계선생으로 벼슬은 보문각 제학이다. 제학공이 제안을 낳으니 생원이요 생원공이 종아를 두었으니 목사요 목사공이 옥견을 두었으니 별제였으며 집의 증직을 받았다. 집의공이 증승정원좌승지 숙을 낳고 승지공이 증이조참판 유명을 두었으니 진사로 공의 고이다. 공의 귀로 인하여 삼대가 증직의 은전을 받은 것이다. 참판공은 갈천 임훈을 사사하여 학문에 극진하였으니 같이 나간 문인들이 모두 그 아래서 배출되었다. 금상께서 효행의 정려를 내렸다. 장사랑 진주 강근우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니 익은 공의 처형으로 유행이 넉넉하였으며 부인도 어른다운 풍도가 있었다. 부인은 공을 서기 1569년에 역양리 집에서 출산하였다. 공은 나시자 두각이 참연하여 보통아이가 아니었다. 일찍이 기죽놀이를 하면서 말하기를 작은 골짝에 큰 인물이 날것이다 하니 마을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었다. 처음 입학을 할 때는 말을 더듬거리며 글이 제 또래에 뒤졌으나 고통을 참고 복습하여 다른 아이가 열 번 읽을 때 자신은 천 번을 읽는 명성으로 문리가 급속하게 진척하여 미관에 대성하니 명성이 자자하였다. 갈천이 본래 수감이 있었는데 공을 보자 장래에 널리 사람을 귀복시킬 인물임을 점쳤었다. 공은 비록 연소하나 기우가 준정하고 제행이 방엄하며 말이 적으면서 스스로 헤아려 독서에 열중하니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이 모두 경외하였다. 열아홉 살에 향시에 높은 등급으로 합격하니 참판공이 부인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인물이 될 사람이라 임자는 그 영광을 볼 수 있겠소 하였다 한다. 서기 1596년 참판공의 병이 위중하여 공이 참새처럼 뛰며 하늘에 축도하니 끊겼던 숨결이 다시 이어지기 여러 번 되풀이 하였다. 그때 왜구들이 벌떼처럼 남녘에 모여드니 공은 모부인을 모시고 영호남 지방으로 피난을 하면서 엎치락뒤치락한 그 고생이야 어떠했으랴? 그러나 상복을 입은 채로 걷고 걸어가면서 구걸을 하였으되 모부인의 식음 조절에는 결함이 없었다. 서기1605년에 영남의 선비들이 오현종사를 상소하였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공을 추대하여 서울에 들어가니 선조께서 이를 가상하여 정시를 베풀었다. 이때 공이 제2명으로 합격하니 서울사람들이 그 글을 서로 전하면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서기1606년에 진사가 되고 서기1610년에 별시 제3인에 등제하였다. 1611년에 성균관 춘방설서로 승진되자 곧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이해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거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허무맹랑한 요사스러운 말에 현혹되어 정능궁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므로 공이 독단으로 계주하여 강경히 반대하니 광해군이 진노하여 경성판관으로 좌천시켰다. 공이 서울을 떠남에 일송 심상이 손을 잡고 말하기를 공은 구설을 받은 때문이요 이 나라의 장래가 어찌될까 걱정이요 하고 위로하였다. 공은 부임하자 아전과 백성들을 각각 그 도에 맞게 다스리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해 서울 이북의 함경도까지 흉년이 들어서 굶주림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얼굴색이 누렇게 변질되었으나 공의 흉년에 대비한 효율적 조치의 힘으로 백성들의 혈색이 되살아났었다. 1614년 아전과 도민을 대하고 시종들과 생활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덕이 있다 하였다. 1612년 광해군의 책략과 1608년 상소의 공열에 참여시켜 장악첨정으로 불렀으나 공은 공이 없었음을 들어 극력 사절하였다. 그러나 이이첨 등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정모가 사절하는 것은 공훈이 오래가지 못할까 우려한 것이 아닌가? 하고 내색을 하기에 공은 말없이 물러나왔다. 1613년 여름에 도적 서양갑 등이 구속되어 연흥 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거짓 진술을 강압에 못 이겨 토로하였다. 이것은 자전을 마음대로 하는 무리들이 합세하여 꾸며낸 것으로 공경대신들은 그들의 속임수를 번연히 알면서도 일언반구도 입을 열지 않자 공이 이이첨을 보고 책망하기를 여덟 살의 동자가 어찌 역모를 꾸미겠는가? 하며 꾸짖고 자전에 아뢰니 자전이 여관을 폐하고 대군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만약 거리낌 없이 말한다면 그 재앙을 누가 감당하겠나? 하니 이이첨이 소리를 지르며 말하기를 대비를 같이 폐하면 누가 불가하다 하겠느냐? 함에 공은 되돌아보지도 않고 나와 버렸다. 이에 이이첨이 골수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 그해의 5월에 탄핵을 함에 따라 공은 환향을 하였다. 정인홍과는 사는 곳이 가깝고 오래전부터 친히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편지로서 여덟 살 동자에게 잔인한 짓을 하는 조정의 무리들을 죄로서 다스릴 것을 요청하는가? 하면 정인홍이 직접 앞장서서 동자를 구출하여 줄 것을 바랐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겨울에 시강원 필선으로 제수되었으나 시의가 맞지 않아 체직하여 주기를 고하니 당도자가 역당으로 보는 눈치였다. 1614년 이월에 영창대군이 울타리 속에서 죽으니 생각건대 강도유수 정항이 조정의 의논에 따라 죽인 것으로 생각된다. 공은 부사직으로서 봉사상소 한 말이 천여백언이었으니 그 대략은 전하께서 인륜의 변을 당하여 처변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결국은 추하고 모진 무부에게 힘만 빌려준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성덕에 누를 끼침이 이미 크지 않습니까? 범인을 무고하게 죽이는 것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거늘 하물며 전하의 동기를 죽인 죄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정항을 참수하지 못하고는 선왕의 묘정에 설 면목이 없사옵니다. 대비께서 비록 전하를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전하께서 어찌 대비께 효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라도 참사를 꾸미는 길을 차단하고 전하께서도 공손한 아들의 직분을 다하시어 문안과 시선의 예를 폐하지 마시고 대비의 환심을 얻는데 힘쓰신다면 지난날의 실수가 충분히 사라지고 새로운 돈목이 되 밝아질 것입니다. 지난번 대관 정조 윤인 정호관 등이 처음으로 폐비 살제의 논의를 제기했을 때 인군의 신자로서 이를 참을 수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 모자의 은혜를 존속시키고자 하신다면 속히 이 세 사람을 잡아다가 나라밖에 추방한 연후에 참설하는 자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삼강과 오상을 온 나라에 밝게 계시하셔야 하겠습니다. 상소가 접수되자 광해군이 우뢰같이 성을 내어 정원을 책망하고 소를 받친 승지를 죄로 다스리라 하니 삼사의 합의로 관직을 삭탈하고 절도에 안치시켰다. 이에 광해군은 그 벌칙이 오히려 가볍다 하여 삼사를 호되게 나무라니 삼사는 다시 압송하여 문초하고 옥에 가두었으며 금부에서는 정례에 따라 대신들에게 죄의 논의를 요청하였다. 이에 우의정 정창연 원임 이원익 등이 죄를 논하여 말하기를 정모는 진실로 미친 듯이 망령된 말을 거리낌 없이 하였으나 생각하옵건대 어찌 임금을 업신여기는 부도덕한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너그럽게 처분하시기 바랍니다. 하였고, 심상 희수의 의논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이완평에게 말하기를 정모의 상소는 말끝마다 음흉하니 임금을 업신여기는 부도덕한 말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였다. 이때 삼사의 관학들이 까치떼처럼 일어나서 공에게 적용할 법규가 없고 군사로 반역한 죄가 아님을 들어 상소를 하려 하였으나 서로 말을 막는 농락에 걸려 그 위기를 깨우쳐 주지 못하였다. 6월에 광해군이 친히 문초를 하고 옥에 가두었다가 가을에 재차 문초를 하고 대정에 안치하였다. 공은 다섯 달의 감옥생활을 하였다. 처음 투옥되었을 때 한 노인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하느님 하느님! 이렇게 어진 분을 옥에서 죽지 않게 하소서! 하니 옥졸들도 서로 눈짓을 하며 더욱 존경하였다. 정항도 사람을 보내 전하기를 저는 공의 의리에 심복합니다. 공의 뛰어난 의협심은 제가 도저히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으며 정호관도 공의 상소문을 보고 역시 말하기를 나는 영원한 죄인을 면하지 못하였고 하고 날마다 술로 그 비통한 마음을 달래다가 병들어 죽었다. 선생이 옥에서 나오자 서울 사람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교통장애를 일으켰으며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공이 살아 나온 것을 기뻐하고 귀양 감을 슬퍼하였다. 당시의 조무래기 아희들도 공의 이름을 암송하는가 하면 부인들은 공의 상소문을 번역하여 집집이 돌려봤다. 공이 해남에 당도하니 호남의 선비 송흥주 등이 상소하여 공의 충국애민 정신을 극찬하였으며 정언 오장 이언영 강대수 등도 연좌하여 공을 돕다가 귀양도 가고 축출되기도 하였다. 공이 대정에 귀양살이를 할 때 갈아입을 옷이 없어 밖에 나와 햇볕을 못 본지 십년세월이 흘렀으되 이를 편안히 운명으로 여기고 오히려 백운사를 지어 사친의 심정을 달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암울한 조정에 발탁되었을 때 곧 바로 달려왔으니 앞서 축출된 신하들 가운데 공이 으뜸이었다. 처음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제주도를 더나 온지 수일도 못되어 사간으로 승진하니 명을 받은 다른 관리들이 길에서 서로 우러러 보았다. 이로부터 해마다 승진하고 천역하여 고관에 이르렀으니 간원에서 헌납과 사간근무가 각각 한번씩 이고 대사간을 일곱 번이나 역임하였다. 헌부에서는 대사헌을 네 번 부제학 네 번 도승지 세 번씩을 각각 역임하고 이조에서는 참의와 참판을 세 번 기타 예조 병조 형조 등 삼조참판과 한성좌윤 경상감사 남원부사를 역임하였으며 혹은 특은으로 혹은 편양으로 혹은 호종으로 많은 은총을 받으면서 근무하였다. 그러나 대부인이 많이 노쇠한 관계로 한 직위에 수개월을 머문 적이 없었다. 1624년에 평안병사 이괄의 반란으로 임금이 남행할 때 공은 이조참의로 호종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인하여 상은 강도로 피난하고 소현세자는 분조하여 호남으로 내려갔는데 공은 마침 집에서 변을 듣고 강도로 달려가다가 조정 선비를 길에서 만나 오랑캐들이 사방에서 날뛰므로 비록 간다하여도 행재소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니 공의 맏아들 역시 본조로 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공이 질책하기를 편할 데로 관망만 하는 것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다 하면서 나무랐다. 이때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대부나 선비들은 모두 편한 길을 따라 분조로 갔으나 오직 공은 강도로 직행하니 온 조정사람들이 찬탄하여 마치 초나라 사람들이 섭공을 보고 따른 것과 같았으며 인심도 역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충심으로 굳어졌다. 이에 공은 상소를 하면서 첫 머리에 화의의 잘못과 홍립의 허물을 지적하고 끝으로 우리와 적의 형세를 말하였으니 모두가 실사구시가 아닌 것이 없었다. 이에 왕은 공을 중히 여겨 직절한 선비로 예우하였다. 공은 여러 신하들 중에 우국충절이 뛰어났으므로 조정의 선비들도 공을 따르고 존경하였다. 그러나 간혹 반론을 펴는 자도 없지 않았지만 공은 이연히 대처하여 감정을 품지 않았고 옛 지조를 더욱 지켜 독려하였다. 앞에 닥친 일은 어렵고 쉬운 것을 가리지 않고 추진하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도 과감히 다스려 회피하지 않았다. 공이 사간이 되었을 때 광해세자의 도출사건이 일어나자 삼사와 연합하여 율론을 고안하였다. 대사간이 되어서는 인성군이 역모에 가담했다 하여 삼사를 불러 모아 죄를 청할 때 공은 전은을 추진하면서 부제학 홍서봉과 왕 앞에서 논쟁하였으며 서봉이 공을 공박하자 응연하게 대꾸도 아니 하고 정도를 고수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사간의 말이 옳다 하였다. 공이 비로소 도승지에 임명되니 그해가 병인년이었다. 때는 바로 인헌왕후의 상을 입은 때라 사친의 초상에는 삼년상을 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상소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1630년 봄에 태묘의 소나무가 벼락을 맞았다. 이에 상이 구언에 대한 공의 말 가운데 형옥이 중심을 잃었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하면서 공족가운데 노약한 사람은 죄를 사하여 줄 것을 청하니 양사에서 탄핵하여 역론을 비호한다 하므로 체직하였다. 1633년에 무고로 인한 옥의 사건이 있었다. 공은 대사헌으로서 무고한자를 조사하여 연좌 체포된 자를 석방하고 또한 대군이 대로 영실을 벗어나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을 조사해 올림에 임금이 즉각 중지 명령을 내렸다. 동지 경연에 발령되자 선친의 무덤 수축을 위하여 여가를 상소하니 왕은 이를 허락하고 본도에 그에 따른 제반 물자와 제례준비를 도와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해 가을 대명전에 벼락이 떨어졌다. 공은 시골집에 있으면서 왕의 명을 받고 답하기를 인주의 대본은 임금이 바로 임금다운 자세를 취해야 한다 하니 상은 오래 마음에 새겨 잊지 않겠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듬해 왕은 다시 헌장으로 발령하고 미처 사절하기 전에 공문으로 거듭 알려 왔다. 생각하건데 당시 전례에서 정하여 보낸 것으로 조정에서 생각하기를 공이 언책을 맡으면 꼭 잘 처리할 것으로 사려한 것 같다. 정원에 들어오자 곧 경사를 증거로 갖추어 상소하니 모두가 선비들이 일찍이 말한 적이 없는 예문들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1635년 여름에 목릉과 유릉에 벼락이 떨어졌다. 임금이 대신을 시켜 그 진상을 보고하라 하였으나 그 내용이 일반 여론과 달랐다. 공은 봉사 상주하여 질언을 피하지 않았다. 또한 예관이 사당에 신주를 모실 때 양릉이 다 재앙의 날이기 때문에 죄가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다하고 탄핵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 가을에도 천둥과 태풍이 있었다. 이때 공은 바람이 사직당의 나무와 묘목을 쓰러뜨렸으니 이 무슨 하늘의 경종입니까? 하고 임금께 말씀하기를 전하께서는 깊이 반성하여 견책을 입은 대신들을 소환하고 직언을 하다가 연루된 신하를 모두 석방하여 진실한 마음을 가짐으로 하늘의 뜻에 순응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 바랍니다. 하였고, 또 말씀하기를 비원에 못을 파서 방주를 즐긴다는 외인들의 시끄러운 소문들이 점차로 퍼져 전하의 마음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러나 대풍의 재해를 가지고 나라의 재앙이라고는 할 수 없사오나 전하께서는 항상 경계하옵소서. 또 말하기를 서경에 희뜩희뜩 흰머리 많은 백성들 좋은 바람 좋은 시절 바랐건마는 백성들의 잃은 터전 오늘 더욱 심하니 천둥바람 미친 비가 쏟아 붓는가? 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재해 지역에 세금을 감하여 구휼함으로서 백성들의 생계에 지장이 없게 하소서! 하였다. 특진관으로 입시하여 노쇠함을 들어 퇴임을 간청하니 상이 따뜻이 답변하기를 경과 같은 충직한 분이 어찌 조정을 떠나서 되겠소! 정경세가 이미 죽었고 장현광이 많이 노쇠하여 국사를 의논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경을 또 어찌 보낼 수 있겠소! 하고 연달아 묻기를 경포전에 이런 심한 풍재를 본적이 있소? 함에 공이 대답하기를 신은 아직 못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신묘년에 풍재가 있었고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났다 합니다. 하였다. 부제학으로서 강의를 하는데 나아가 말하기를 옛 사람들은 시를 공부할 때 장구를 인용하지 않고 의리를 깨우친 것이 많다 하였으며, 유녀동거의 강론에 있어서는 유녀동거는 남녀가 즐기는 극치라 하였다. 고어에 현현역색이란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옮기자는 뜻이니 곧 어진 분을 좋아하는 정성이라 하였다. 탁혜장에서 고목의 잎이 떨어지려고 할 때 바람이 불면 잎이 더 빨리 떨어지고 나라가 망하려고 할 때 정치를 잘못하면 나라의 패망이 더 빨라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다른 글도 모두 경계와 충간의 뜻으로 깊이 깨우쳐 인용하니 임금은 재삼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강론을 마치고 또 나아가 말씀하기를 시사가 염려스럽습니다. 만약 국사가 다급해 진다면 지존께서는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오직 국가 사직과 같이 죽는다는 각오가 있어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1636년에 적의 사신 용골대가 방자하게 굴자 온 나라가 들끓었다. 공이 옥당에서 차자 삼조를 올렸는데 그 첫째는 쇠퇴한 나라를 일깨우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세울 군주는 영웅다운 위무의 덕을 갖추지 않으면 될 수 없다는 말은 중국 당 고조 때 태자의 스승으로 자주 직간을 한 이강의 말입니다. 전하께서 보잘것없는 반찬에 아(兒)여자의 일이나 돌보는 일을 가지고는 흥시 반란의 영울이 될 수 없습니다 하였으니 때는 인열왕후의 산릉을 겨우 마친때라 왕의 건강을 염려한 말이었다. 두 번째는 절의에 목숨을 바친 선비는 군왕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직간한 사람 가운데서 구할수 있다는 말은 바꿀수 없는 정론입니다. 전례서에서 때로 언사를 하는 신하는 바로 범안의 선비가 아닙니까? 이러한 선비들을 긴급히 가려서 등용하여야 합니다. 세 번째는 아문의 군관을 육성하는 일과 포살 전술훈련은 완급을 참작하여 정예로운 장정을 뽑아써야하니 지금 당장 적을 상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잠시도 지체할수 없는 일입니다. 의주에 효사과를 설치하는 일 역시 군의 사기를 돕는 말인데도 현 여론에 거리가 멀다하여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해 12월에 적이 맹약을 깨고 침략한 수일만에 황봉을 뚫고 송경을 휩쓸었다는 급보가 당도하니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공은 이조참판으로 왕을 호종하였다. 성이 포위된 가운데 네 번의 차자를 올렸으니 그 대요는 군신과 부자가 한데 뭉쳐 성을 지고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마음은 동요해서는 안된다는 요지로 조정의 사기를 크게 도왔다. 12월24일 척화신을 찾는다는 소문을 듣자 공은 자신이 먼저 나가기를 청하였다. 이날밤 무장한 적병들이 대궐밖에 모여 척화신을 내어달라 하니 묘당에서 10여명을 명단과 함께 적진에 넘기려 하였다. 이때 어떤분이 임금께 말하기를 척화에 가담한 신하는 모두 당세의 존경받는 인재인데 후세의 원망을 어떻게 감당하려 하십니까? 하니 왕이 슬퍼하여 중지를 명하였다. 1637년1월27일 조정의 당사자가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갔다 하나 글의 내용은 비밀로 알수가 없었다. 이에 공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임금의 욕됨이 이지경에 이르렀는데 신이 감히 죽음을 아낄수 있느냐? 하고 통곡을 하면서 새벽에 일어나 그의 이불위에 똑바로 누워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자기 배를 스스로 찔렀다. 시자가 이를 발견하고 이불을 걷어보니 칼날이 뱃속 깊이 꽂혔었다. 깜짝놀라 칼을 뽑으니 선혈이 같이 솟았다. 헐떡이는 숨결은 끊어진 듯 이어지매 오랜시간을 지난후 조정의 신하들이 모여 응급 구제하였다. 왕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어의를 보내 치료하고 광주목사에게 정성껏 투약간호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어의가 공의 상처를 진단하고 말하기를 뒤에 혈옹이 생겨 완치가 어려울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후에 그러한 증세로 어가를 호종하지 못하게 되자 차자로 사의를 표하였다. 차자의 내용은 한결같이 의리를 말했을뿐 자신의 이해 관계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월에 공은 편여에 누운채로 남하하여 본가에 살지 않고 말하기를 남한산성에서 목숨으로 국은을 갚지 못한 내가 무슨 면목으로 처자의 봉양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며 덕유산 남녁 줄기 모리에 들어가서 띠집을 짓고 찰조밭을 가꾸며 조석을 보냈다. 1641년 6월21일 기축에 졸하여 모산에 장례하였다. 아! 공은 백척 정정한 곧은 성품과 가을서리와 밝은 태양같은 만고의 절개를 지녔었다. 지난 1613년에는 내심으로는 핍박하고 겉으로는 아첨하는 뭇 간신들이 온갖 법망을 꾸며 반년을 보궁에 구금하면서 죽음의 위기에 몰아 세운 가운데 구사일생 하였으나 공의 절의는 빼앗지 못하였다. 그후 1636년 병자호란때 욕철의 수십만 기마병이 남한산성에 육박하니 팔방에서 싸우는 군병들은 패하거나 도망을 가서 밖에서는 개미 한 마리도 전쟁에 나설 기미가 없었다. 관리나 무장기마병들도 죽음의 공포에 떨며 몰려와서 목숨을 애걸하였으나 공만은 그 절개를 꺾을 수 없었다. 그 강직 그 절개의 양성 근원이 있었으니 부자께서 이른바 삼군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어도 필부의 지조는 빼앗을수 없다는 말씀과 맹자가 말씀한바 부귀를 가지고도 그의 마음을 흐리지 못하고 위무를 가지고도 그 지조를 굽힐수 없다는 말이 아니겟는가. 그러나 공을 한곧은 신하로만 여긴다거나 한 절의의 선비로만 안다면 이는 그를 견문이 좁은 장부로 보는 얕은 소견이다. 공의 학문은 그 이목이 가정에서 단련되어 저절로 능력이 형성된지 이미 오래고 약관에 조월천 정한강의 문하를 두루 거치면서 퇴도 이선생의 학문의 실마리를 듣고 즐겨 그를 사숙한 영향도 많기는 하나 학문을 실천한 독실한 공은 오직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얻은 것이다. 평생동안 직 방 대의 삼자를 일신의 병부로 삼으면서 본원을 깨우치는 데는 심경을 근본으로 삼았다. 의리를 닦는데는 정주학에 근본을 두고 성리대전에 있는 노련한 문장에 착력하여 세수 관망을 하거나 혼정신성의 시간 이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상머리에 꼿꼿이 앉아 연구에 몰두 하였다. 일찍이 선배들이 인품을 논하기를 인성은 두가지로 나눌수가 있으니 강과 유이다. 강은 양에 속하고 유는 음에 속하는데 강과 유의 바름을 한꺼번에 충족하지 못할 처지라면 차라리 강하여 잃는 것이 났다. 때문에 주역에서 양강군자를 귀하게 여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학자는 심소담대를 일신을 세우는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속수사마광 선생은 평생동안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담대하였으므로 그 훗날 이를 수용할 처지가 많았었으며 이것이 곧 한절개라 하였다 한다. 공은 사람 됨됨이가 광명준위하고 표박이 여일하여 사람들과 같이 있을때는 순순하고 개제하여 악악한 표정을 한다거나 갈피를 짓지 않으며 높은체 하거나 거만스럽지 않고 요순의 여인동의 뜻을 온전히 간직하여 조정에서 시비쟁론을 하여도 정정당당히 직언을 하여 태산교악처럼 우뚝하였다. 비록 맹분과 하육의 힘으로도 그 지조를 꺾지 못할 정도로 강직한 성품이로되 평소한느 말씀은 효제충신에 바탕하였으며 깊은 이치나 미언에 대하여 경솔하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공을 보는 세상의 눈은 그가 독실한 참 선비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원조 자경잠의 구중설이나 덕변록같은 글은 공의 중만기후의 작품으로 공의 덕과 도를 잘 알 수 있다. 제주에서 유배 생활 10년동안 경사와 백가의 글을 읽었으며 주역은 일일 일쾌씩 암송하였다.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맹자와 한비자였으며 느지막에는 구양수의 글을 좋아하였다. 글을 지을 때는 생각지도 않은 것 같으면서 큰 물결을 출렁이듯 잠시동안 수천마디를 쓰되 이치와 사설이 잘 어울려 넓게 점철된 것이 그 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하였다. 효와 우애는 천성으로 타고났다. 열 살때 참판공을 여막에서 시중들며 집전하고 절하는 모습이 성인과 다름이 없었다. 또한 육식을 금하고 재기를 마치는것도 참판공과 같이 따라하였다. 모부인이 육식을 권했으나 참판공의 종신상을 말하면서 듣지 않았다. 아무리 추운날이라도 목욕을 하였고 목욕을 할 때는 어른과 함께 하지 않았다. 탕욕과 빙정욕을 하였으므로 아랫배에 병의 응어리가 생겨 평생을 앓았으나 부모는 모르게 하였다. 모부인이 본래 설사 병이 든지 오래였는데 그맛을 보아 가며 치료하였고 돌아가는 해에 또 설사를 하므로 손으로 찍어 그 맛을 보고는 울며 말하기를 대변 맛이 옛날과 다르다 하더니 결국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62세였다. 묘 아래 여막을 짖고 삼년상을 마치면서 나물도 좋은 것은 입에 넣지 않았으며 최질은 잠시도 벗은적이 없다. 상기를 마침에 아무도 연문이라 비방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사람들은 그저 그런 사람으로 여겼다. 비록 신명의 도움으로 굳센 성품을 타고났으나 보통사람과는 다른점이 있었다. 형을 섬기고 동생을 돌봄에 공경과 우애를 아끼지 않았으니 형제들과 같이 상을 차려 먹지 않는 날이 없으며 창안 백발을 날로 상대하여 화락한 기색이 손에 잡힐 듯 하였으니 생각건대 공의 도는 효를 극진하여 충으로 옮기고 충을 극진하여 절의가 나타나는 것이나 절의는 곧 변을 당할 때 발하는 것이었다. 선생이 인묘에 알려진 것은 좀처럼 보기드문 일이지마는 누가 그것을 막으랴. 그러나 그 도를 끝내 대행하여 보지 못하고 위난만 겪다가 끝내 의열로 마쳤으니 아! 이것도 천운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임금 3년 임진에 이조판서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과 대제학 세자좌빈객이 증직되었고 정유년에 문간의 시호를 받았다. 부인 윤씨는 파평의 이름난 성으로 충의위 모의 따님이다. 성품이 정의롭고 밝으며 종을 부리고 가산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공이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할때 집을 잊지 못할뿐만 아니라 생업이 없어 가난한 중에도 세아들의 해외 나들이 자금을 도왔으니 그 어짐을 짐작할 수 있다. 공과 동년생이면서 공보다 일년 먼저 졸하여 1641년에 거창군 북쪽주곡에 선생과 같이 천광을 하였다가 1651년에 거창 용산의 선비묘 앞 오향에 옮겨 합장하였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은 창시다. 벼슬은 공조정랑으로 네차례의 현감을 나갔는데 역임한 고을마다 치적이 있었다. 둘째와 셋째는 창훈과 창모로 모두 재행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연달아 일찍 죽었다. 측실의 아들은 창근으로 사과정랑이었으며 충의위 이희옹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일남 일녀를 두었으니 남은 기수로 성현찰방을 지냈으며 딸은 최서옹에게 시집갔다. 창훈은 류영정의 딸에게 첫장가를 들어서 일녀이남을 두었는데 사위는 이휘였고 아들은 기헌과 기장이었다. 후처로 신전의 딸을 맞이하여 일남을 두었는데 어리다. 창모는 대군의 사부 박공구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일녀를 두었다. 남은 기윤이며 큰딸은 조하현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고 둘째는 윤형귀에게 시집을 갔다. 창근은 도사 이서의 서녀에게 장가들어 네딸을 두었으니 어리다. 찰방 기수는 목사 나위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사녀일남을 두었으니 큰 딸은 강휘만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기윤은 장령 허목의 딸에게 장가들어 삼남을 두었다. 불영이 선생보다 17년의 젊은 나이로 선생을 어른으로 모시고 다녔는데 선생께서는 나를 선후배로 갈라 생각하지 않고 옆 대열에 가깝게 맞아주신지 10여년이라 선생의 덕성을 보고 심취한 것이 결코 얕은 세월은 아니었다. 계속 진퇴의 용단을 내리고 대절을 세워 정무를 처리하는 과정을 뒤에서 똑똑히 보아왔다. 그러나 불초한 내가 이것만을 가지고 어찌 감히 선생을 깊이 안다 하겠는가? 또한 옛날 불영이 모리에 있는 선생의 초가를 찾아 질그릇에 겨우 껍질만 벗긴 밥을 보고 선생님! 참으로 고생이 많습니다 하고 문안을 올리니 선생은 빙그레 웃음만 지을뿐이었다. 이러한데 내가 어찌 선생의 높은 덕성과 깊숙한 심지를 안다 하겠는가? 그러나 이를 무릅쓰고 명하기를 중주의 숙기 뻗혀 동녘에 울창하고 덕유산 용문폭포 웅장히 맺힌 명당! 정기라고 나신 위인 지령을 짝한 기백! 암울했던 조정에서 옥설같은 직언폈네. 천망 지망쓰다 한들 재채기도 아니하고 대정으로 안치되어 박주찌기 마시면서 이무기 상대하며 삼분오전 옛 글 읽기 감질난 덕과 지혜 그 빛 누가 더럽히랴? 성상 분노에 인륜을 밝혀 강금에서 벗어나자 조정을 뛰쳐나니 매서운 선비충고 복의를 한번 여니 뭇 사람들 껄걸 웃어 예론 밝은 한림 선비 홀로 당당 우뚝 섰네! 벼슬길 편할려면 유설이 상책이나 일마다 다투자니 부지런히 되레 용렬 흠집마다 보선하니 졸당들기만 추겨주고 개연한 굳은 심주 주철같은 간담이라 임금은 귀 기우려 목 마르게 정치 자문 공이 올린 정책 구상 직설을 본 땄었네! 병자호란 올린 말씀 군신 부자 배성일사 손 뒤집듯 쉬운 계책 위기 극복 가능한걸 그 누가 사전대비 어둡다 하였는가? 어쩌랴? 뚫린 하늘 이미 막기 어려운걸 뒤늦은 말고삐로 외로운 종군 고래가 물을 뿜듯 밤 습격도 못해 봤네! 정강제의 전철로 성안이 들끓으니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는 것이 옛날의 공열 내가 나를 격려코자 칼로 배를 갈랐으니 끊겼다 살았다 붉은 피가 솟았었네! 그 충심 갸륵하여 어명으로 치료하니 열성조 기른 기백 그 누가 지을소냐? 하오나 공의 포부 어찌 일절뿐이겠냐? 낙수의 강물처럼 퍼고 퍼도 못말리리 직내 방외 쌓은 인품 평생 백년 비결이라 서상에서 분필 향례 곳곳에 걸린 백판 후학들 천추만대 태산처럼 우러르니 전철 짝한 크신 업적 여기 새겨 보이노라.

정헌대부지중추부사 조경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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