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전(潘腆)의 효행
서기1388년(고려우왕14년)에 감음현 사람 반전이라는 효자가 왜구의 참화를 당하여 연로한 부친을 업고 피란 중 무릎이 달아 피가 많이 흘렀는데 반전은 부친의 안전에만 신경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자기 무릎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그 피의 흔적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까지 오히려 더 붉게 남아 있으니 자연 머리가 숙여진다.
그리고 고려사열전 권제34호 반전기(潘腆記)에 의하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반전은 안음현 사람으로 정8품의 무관인 산원 벼슬을 하다가 향리에 있었는데 우왕14년에 왜적이 창졸간에 닥쳐 그의 아버지를 잡아 돌아가거늘 전(腆)이 은정(銀錠)을 가지고 적중에 가서 아버지와 교환하기를 청하니 적이 이를 의롭게 여겨 허락하였다는 내용이다. 나라에서는 그의 효성을 높이 찬양하고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제 반씨(巨濟潘氏)가 어느 때 이 고장에 입향해서 어느 때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강천리(薑川里) 역골(嶧洞)에서 누대를 살았는데 반전이 효향(孝鄕)의 사표(師表)가 되었고 좌윤 반숙(潘淑)이 문질공 이예(李芮)의 사위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화림지(花林誌)는 고적편 반전암 조에 보면 원학동(猿鶴洞) 어구인 장풍 모퉁이에 효자 반전이 살던 곳이라는 뜻의 글을 새겨둔 바위를 반전암(潘腆岩)이라 하였는데 이 반전 암에는 “효자 반전구거동문(孝子潘腆舊居洞門)”이란 여덟 자의 한자가 있었는데 일제초기에 도로확장 공사로 파괴되어 사라졌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왜구의 침입
남부 내륙 깊숙한 이 지방은 피난지로 알려지고 왜구의 큰 병화는 입지 않았으나 서기1379년인 우왕5년에는 처음으로 거창지역까지도 침입하였던 것이다. 그 이듬해 침입한 왜구는 함양의 사근역(沙斤驛)에 주둔하면서 치열한 싸움이 있었는데 그 일부가 거창에 침입했던 사실을 향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근 싸움은 우리 측 군사가 500명이나 전사하였고 함양이 함락되었다. 남원방면으로 진출하는 왜구를 이 성계(이조태조)는 이두난과 함께 운봉의 황산대첩에서 말1천600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였다. 이때 냇물이 온통 피로 물들어 7일간이나 변하지 않았다니 얼마나 처절한 싸움이었나를 짐작케 한다. 서기1388년인 우왕14년에는 도내 전역에 출몰하여 각지(各地)를 마구 짓밟고 살인 약탈하였으니 우리 감음 땅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효자 반전을 비롯한 많은 향인이 숫한 적난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