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천면 황산리 769번지에 있다. 서기1694년에 세워 요수 신권(樂水愼權)과 석곡 성팽년(石谷成彭年)을 향사하다가 1808년에 황고 신수이(黃皐愼守彛)를 후향(追享)하였다.
1868년에 훼철(毁撤)되었다가 1988년에 복설(復設)하였다. 춘향은 음력3월 말정(末丁)이고 추향은 음력 9월 말정이다.
건물은 본당이 1945년에 소실되었던 것을 1946년에 재건하였고 후원에 구연사(龜淵祠)와 신문(神門)이 있으며 앞으로는 정면에 관수루(觀水褸)가 있고 동편으로 전사청(典祀廳)과 관리사가 있다.


구연서원 강당 중수기 역문(龜淵書院講堂重修記 譯文)
강당은 구연서원의 강학하는 곳이니 숙묘갑술에 창건하였다가 기해(己亥)에 옮겼고 갑신년에 중수를 하였으니 이번까지 네 차례다. 집의 뒤쪽은 덕유산의 낙맥으로 송계와 영취를 거쳐 그 밑에는 여러 개의 시내와 재가 있다. 성천이 남령에서 발원하여 굽이굽이 흘러서 이곳에 이르러 평탄한 터를 이루니 형태가 반달 같은 황강의 서쪽 언덕이다. 본래 안음은 경치 좋은 곳으로 널리 이름이 나 있으나 화림(花林) 심진(尋眞) 원학(猿鶴) 삼동 중 수석이 수려하고 연하(烟霞)가 아름답기로 원학동이 제일이다. 남쪽 삼산(바래기)으로부터 북쪽 사선대에 이르기까지 기암괴석과 맑은 물의 급한 여울이 천태만상으로 한결같이 큰 장관을 이루었으므로 송동춘당(宋同春堂)이 제일동이라 명했고, 퇴계(退溪)는 수승대(搜勝臺)라 고쳐 불렀다. 이 대의 이름이 금강(金剛) 화양(華陽)과 함께 해동(海東)의 명승으로 앞 다투게 되어 삼한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도록 이름난 어진이며 큰 선비 한인묵객들이 끊임없이 연이서 사면(四面)에 틈이 없이 글자를 새겼다.
바위가 신기하게 거북과도 같고 용마와도 같아서 위에는 축단을 쌓고 아래는 굴집이 있으며 굴집 앞에 장주갑(藏酒岬)이 있어 그 모양이 소라같이 깊어서 두어 말 술을 간직할 수 있고 바로 앞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구연이 있으며 구연의 좌우상하가 모두 반석으로 면적이 꽤 넓다. 그 사이 구연교가 있고 다리 아래에 약어담이 있어 비가 내리면 물고기들이 물 밖 반석에까지 뛰어 오른다. 구연의 양암은 용의 따바리(똬리) 같은데 이곳이 나의 선조 요수선생께서 노닐던 요수정이다. 정자의 아래쪽 야담(夜潭) 위에 옛날 있었던 정사가 야천선조의 정사로 여러 생도들이 강마하던 곳이며 수승대 바위아래 한쪽 도서(섬솔)의 노송은 황고선생이 손수 심었고 섬솔의 동쪽 두 바위 사이에 관수루(觀水樓)가 있으니 곧 서원의 문루이다. 동편에는 풍우대가 있고 서쪽에는 욕기암이 있으며 영귀정(詠歸亭)이 있고 남으로는 척수대(滌愁臺)가 있으니 이 모두가 어우러져 서원을 돕고 있다. 사우는 비록 허물어 졌어도 강당은 아직 있으니 향사의 예를 곧 회복할 수 있으리라.
애석하구나! 수호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이루었다. 허물어짐이 여러 번이다. 재작년인 을유년 겨울에 당한 화재는 대단한 축격이 아닐 수 없다. 요수선생을 편히 모시고 강학하던 곳을 잡초에 묻어둘 수는 없는 일이라 후손들이 모아 재건을 다짐하였으니 이듬해 여름에 준공을 보았다. 새로 지은 강당이 나는 것 같이 환연하게 새롭고 창창 밝고 정결함에 달빛이 더해주며 방회람 빛이 나고 숲 바람이 시원하네. 노지영광(魯之靈光) 송지백록(宋之白鹿) 어찌 이에 더 하리… 대대로 뒤따르는 사람들이여 여기서 강학하여 요수선생의 도학을 체득하여 독신호학 할 것이며 춘추향천에는 재명성복으로 반드시 옆에 계신다는 정성으로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길이 보전할 것이다. 무자 춘삼월 갑자일에 11대손 종립(宗立)이 근지하였다.

구연서원 중수기 역문
안의의 구연동은 산수의 승(勝)함이 영남의 제일이다. 그 중에 한 바위가 있어 형상이 엎드린 거북같이 수중에 일어나니 위에 백여 인이 앉을 만하고 수 십주의 노송이 일산을 이루니 대개 본래 신라백제 시대에 사신들이 상송(相送)하던 곳으로 수송대(愁送臺)라 전해왔다. 이조 중종 년간에 우리 종선조 요수선생이 정자를 대상에 짓고 서재를 정 옆에 쌓아서 산수를 관령하여 도를 강하고 학문을 일으키다 퇴계선생과 동경으로 정계가 친밀하셨다. 퇴계께서 그 대명이 아담치 못함을 험의하여 수승으로 고치고 한 율시를 남기시니 대가 이에 더욱 유명했다. 선생이 몰하심에 고을 인사들이 그 덕을 추모하여 사우를 대의동에 지어 구연서원이라 하고 석곡 성선생과 같이 배행하니 요수선생과 한 마을에 사시면서 강질을 많이 하고 충효가 또한 지극하니 때는 숙종갑술이라 그 후 순조무진에 황고 신선생 수이를 배행하니 요수선생의 오대 손으로 덕학이 높아 도암 이문정공의 고제다. 이에 원세가 향방에 높아 많은 선비들이 그 글을 읽고 그 도를 행하여 위연한 교화를 일으켜 추노의 방으로 칭했더니 불행이도 무진의 혼철을 면치 못하니 막중한 예의 장소가 풀이 우거지고 선비가 의귀할 곳을 잃어 경을 강하지 못하고 예교가 행하지 못하여 풍속이 무무하여 구제할 수가 없으니 이겨 탄식을 다할 수 없다. 다행이도 고종 후 재무진에 복설의 사론이 대발하여 기사에 시작하여 몇 달이 못 되어 사우가 완공되니 후손 인범(寅範)이 주관하고 태범(泰範)이 또한 많은 조력으로 명년경오에 향도의 사림이 모아 예성을 하니 이에 산이 더욱 높고 물이 더욱 깊어 운물이 모습을 바꾸고 산천이 광채가 나서 거의 가히 삼선생의 영영을 위로하고 당년의 유화를 흥기할 만한 사실의 기문이 없을 수 없다. 인범 훈범(寅範 薰範)이 나의 글을 청하니 나 또한 이 일에 참여한바 있어 감히 사양치 못하고 약간 그 시말을 기술하고 삼선생의 전현을 잇고 후학에 공이 있음은 전인들의 문자에 가추우고 다 문집과 실기가 있어 가히 상고하여 알 수 있음으로 더 쓰지 않는다.
종후손 사범(思範) 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