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천면 강천리 175번지 강동마을 서쪽에 있다. 고려판도판서로 합천서 입안하여 이 고장을 교화시킨 향조 문질공 이예 선생의 신도비로 해평 윤영구가 글을 지었고 하동 정승현이 글씨를 쓰셨으며 초계 정태균이 전서하다. 서기1938년에 강천재 담장 안에 건립하였다가 현장소로 서기1993년 이건하였다.

역문
문질공 강천 이선생 신도비명 병서
강천 이선생의 신도비가 이루어지매 후손 첨의가 선생의 사실을 기록하여 불영에게 신도비명을 청하니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그만 두지 않았다. 삼가 알찬하건데 선생의 휘는 예요 본관은 합천이다. 고려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도판서에 이르고 시호는 문질이며 호는 강천선생이니 세상 사람들이 일컬은 것이다. 시조의 휘는 알평이니 포암 아래에서 강생하여 신라에 좌리공신이 된 후에 천여세에 계대를 실전하고 강양군 휘 개가 비로소 휘 인영을 낳았으니 평장사이고 휘 돈을 낳으니 중랑장이며 휘익서를 낳으니 시랑이고 휘 존순을 낳으니 좌복야이며 휘 덕손을 낳으니 전리판서로 시호가 장숙공이고 휘 설을 낳으니 찬성사이며 휘 원분을 낳으니 중랑장이고 휘 양진을 낳으니 참지정사이며 휘 규를 낳으니 예의판서이고 휘 수장을 낳으니 한림학사요 휘 예를 낳으니 곧 선생이시다. 강양군으로부터 대대로 충훈과 곧은 절개가 있어서 드디어 동방에 저명한 씨족이 되었다.
선생이 비로소 합천에 살아서 본관을 삼았으며 뒤에 안의 강천동에 살았으므로 인하여 강천으로 호를 삼고 산수가 좋은 임천에 선생이 즐거움으로써 취미를 붙였으니 대개 인산지수에서 나온 것이다. 항상 맹자의 호연장을 외우고 주자의 태극도 보기를 기뻐하여 성리학에 마음을 담구었다. 또 충효의 두 글자를 벽상에 써서 항시 눈을 두고 마음에 새기었으며 삼자를 가르치어 이르되『황금이 상자에 가득함이 너희들에게 충효의 두 글자를 내려주는 이만 같지 못하다』하고 시를 지어 이르되 임금 사랑하기를 부모 기뻐하기와 같이 할 것이니 충효는 본래 진심에서 우러남이라 선성들은 다만 이것만을 말미암았는데 슬프다. 우리 후학의 사람이여! 라 하고 또 이르되 성인이 세상에 부름을 받고 감히 멍에 메기를 기다릴까 시골 사람이 다투어 조회의 행차에 부임함을 축하하리라. 영화의 거리와 두터운 녹봉을 즐겁다 이르지 마오. 다만 신료라는 시위소찬이 부끄럽기만 하다하고 또 이르되 『직책을 풀고 돌아와서 한 백두로 작은 재실을 숲과 연못 아늑한 곳에 지었노라. 산은 신령한 지경에 열리어 맑고 높직이 서 있고 물은 진원을 얻어 활발하게 흐르네. 반평생 뜬 이름 부끄럽기만 하고 한가한 사람의 생계로는 다시 구할 것이 없어라. 고요히 물리를 보매 오히려 즐겁기만 한데 오동나무 달과 버들나무 바람이 상쾌하여 가을이 다가온 듯 하여라』하였으니 다만 이 수구로도 또한 가히 선생의 뜻을 볼 수 있는데 도학이 늙으면서 더욱 돈독하여 하늘을 즐거워하며 운명을 알다가 돌아가며 문질의 시호를 내리었다.
안의의 강천동에 안장하였는데 1803년에 관찰사 정공 만석이 안의고을에 순행 나왔다가 선생의 실적을 흠모하여 사우를 세우라는 지시가 있으므로 사림의 의논이 같은 시기에 일제히 일어나서 이에 원사를 건립하고 선생의 중자 원달과 영계 유공환과 확계 정공옥견으로 더불어 같이 배향되었다. 서원이 철거된 후에 자손이 사모를 부칠 땅이 없으므로 1902년에 강천재를 건립하고 단소를 모아 제향을 지낸다. 배는 정경부인 안음서문씨니 검상사인질의 따님이며 삼남 이녀를 두었으니 맏 자제의 휘는 인달이니 문과로 판서요 다음의 휘는 원달이니 문과로 참판인데 고려의 운수가 장차 다함을 알고 금원산에 은거하여 이조에서 여러 차례 예로 맞으려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드디어 줄여서 마치었으며 다음의 휘는 충달이니 삼사좌윤을 지내었다. 여서 반숙은 좌윤이고 다음 여서는 이세방이다. 휘 흥의는 판서요 휘 정의는 참의요 휘 즙은 유수요 휘 연은 군수니 장방의 소생이고 여서 거창유환은 밀직사사로 중방의 소생이고 휘 권 만호와 휘 평문과 지평은 계방의 소생인데 가풍을 추락시키지 않고 후손을 잘 감싸주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아! 선생의 세대가 지금 요원한데 불행히도 임진왜란을 만나 문헌이 병화 속에 유실되어 당일의 사적을 고증 할 수가 없으니 어찌 후손의 한을 조축됨이 아니리오. 그러나 행장을 지은 자는 선생의 칠세 손 종신이 과연 고증할만한 자라 하겠으며 진사 최연중 장령 신성진 참찬 곽종석 침랑 정재규 교리 정연시 제공들의 기록과 서술한 가운데서 생각하여 알 수가 있다. 명으로써 명에 이르되 강양의 옛 집안에서 돈독하게 철인을 낳았는데 임금을 사랑하고 부모를 기쁘게 하여 충효가 진실하였지 강천위에 용감하게 물러와 높은 종적 머물러 있네. 맹자의 호연장과 주렴계의 태극도를 배우고 연구하여 물리를 즐거워하였으니 버들가지 바람과 오동나무 달이었지. 세상에서 추대하여 종장을 삼았으니 문장과 도덕이네 금계의 서원에 제향을 창설 하였으니 선생의 유풍은 백세인들 과연 잊으랴. 후생이 높이 우러러 외람되이 명사를 가름하노라. 1983년 중추하순에 가선대부전향산수 해평 윤령구 지음 통정대부 전 홍문관 응교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하동 정승현 씀 통정대부행비서원비서승 초계 정태균 전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