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과 더불어 일제 침략정부는 물러가고 자체건국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해방 기쁨을 참지 못하고 각 마을마다 소를 잡고 흥에 겨워 며칠을 소일하였다. UN에서는 남북한을 38선으로 경계하여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고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왜놈의 무기를 해제한다는 명목으로 입성하였다.
남한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발족함에 이에 반대하는 세력인 남로당의 다툼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948년 3월 1일 한국주재 유엔 감시위원회에서는 남한만이라도 동년 5월10일에 단독선 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코자 하였다. 남로당은 이제 적극 반대하여 무지한 백성들을 선동하여 5월8일 야간을 틈타 본 면사무소와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경찰지서를 소실시킨 사건이 소위 5.8사건이다. 이로 인하여 당시 면장이었던 조병욱(趙炳昱)이 피살되었다. 본 사건을 수습하기 위한 우익단체인 대동청년단은 전 면민을 반동분자로 삼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색출한다는 구실로 닥치는 대로 몽둥이를 가하여 대혼란을 일으킨 사건이기도 하다.
1. 여순반란사건과 위천
1948年 4月 18日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발발 후 이를 진압하려는 국군과 대치상태에서 반란군은 빨치산의 세력과 합류하여 본 면에 급습하였다. 선발대는 국군헌병대라 가칭하기 위하여 철모에다 백색 띠를 두르고(당시에는 헌병으로 착각하였다고 함) 본 면 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근무불실이란 이유로 모조리 체포하였다. 당시 지서장은 구금상태에서 아무리 보와도 군인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어 탈출을 하니 이에 무리들은 총기를 난사하였다.
본 면을 경비하는 자생단체로 죽창을 들고 경비하는 자위대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면민을 동원시켰다. 이 단원과 경찰관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토록 종용하고 생활필수품을 약탈하였다. 거창 경찰서로 전화를 하여 서장을 바꾸도록 하여 우리는 국군 제3연대 선발부대라 하며 서장이 직접 진두지휘하여 연합작전토록 명령하였다. 당시 거창에는 3연대 3대대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을 때라 상호간 연락을 취한결과 반란군이라 명백하게 판명되었다.
반란군이 위천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아군이 진격하자 적은 지서 앞에 있는 우체국 정문을 파괴하고 침입하여 금고에 총을 발사하고 금고문을 열고 현금과 유가증권 등을 탈취하여 삼공정미소의 4톤 트럭을 징발하여 본 면에서 약탈한 식량과 생활물자를 적재하여 북상방면으로 도주하였다.
본군 주둔 병력이 북상방면으로 진격함에 따라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당시 적군의 총책임자는 김지회, 홍순석 부대라고 칭하며 괴멸하였다고 한다.
2. 5.8사건(1948년)
왜정치하의 면민의 생활상은 빈부의 격차는 격심하였다. 헐벗고 굶주림의 생활고가 연속되던 때와 더불어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무지한 백성들은 좌·우익도 모르는 처지에 좌익세력들은 달콤한 선동에 현혹되어 좌익세력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유엔 한국임시 위원회에서는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5.10일에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코자 하였다.
남로당은 전국적으로 반대하는 세력들을 규합하여 저지투쟁을 실시함에 따라 본 면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전단(삐라)을 살포하고 야간을 틈타 함성을 지르고 횃불을 높이 들고 경찰지서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지서를 불 질렀다. 이로 인하여 이에 맞선 경찰관서와 우익단체인 대동청년단 등이 출동하여 죄 없는 백성들을 폭력으로 보복한 큰 사건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인명의 살상피해도 적지 않았다.
3. 6.25동란과 보도연맹
6.25 동란이 발발하자 인민군대는 탱크를 앞세우고 남한을 일시에 점령하였다. 우리 면은 동년 7월 29일(음력6월15일)논 고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적의 선발부대가 본 면에 기습하였을 때는 공중에서 전투기가 씽씽하며 교량이나 학교 건물 같은 곳에 폭탄을 투하하여 파괴하였다. 적의 선발대가 침입하여 선무공작을 한다고 지방민을 모아놓고 저들의 정책과 노래 등을 부르게 하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농지를 분배하고 현물세라는 세목으로 벼이삭, 콩알, 잡곡의 이삭 등을 헤아리어 현물세를 징수하고 또한 젊은이들은 의용군에 강제로 모병하여 이에 응하지 않은 청년들은 반동으로 몰아 체포되었을 시 혹독한 벌칙을 가하기도 하였다.
지주들은 토지를 몰수당하고 토지를 수혜 받은 사람들은 자기 토지라 하여 작물을 가꾸기도 하였다. 지역주민들을 동원하여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수단으로 심지어 낙동강 근처까지 동원되었던 사실이다. 이러한 기간은 약2개월이다.
4. 보도연맹 가입자의 죽음
1949년 10월 정부에서는 좌익세력을 뿌리 뽑기 위하여 읍면단위로 보도연맹을 조직하였다. 창설당시에는 과거의 좌익가담 행위를 불문에 붙이고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지도하고 계도해 나가겠다고 하였으나 6.25 동란에 결국 집단총살로 이어졌다.
보도연맹 창설당시 본 면의 문맹률이 70%정도로 농민들은 이것이 무슨 단체인지도모르고 지방 유지나 마을의 덕성 있는 인사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도장을 찍고 가입시키기도 하였다.
6.25 동란으로 인하여 본 면에서는 7.29일(음력6월15일)에 보도연맹에 가입된 분들을 모조리 끌고 가서 합천군 “권빈재” 근처의 산중에 집단총살을 시켰다. 이로 인하여 유족들에게는 연좌 좌에 연루되어 오랜 세월동안 한스럽게 살아왔다.
5. 동난 수복 후의 위천
동난이 2개월 동안 전쟁 중에 민심은 각박하기 짝이 없었다. 생활물자도 고갈되고 농촌에 일손을 빼앗겨 전답에는 풀이 우수수하고 누구나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살았다.
동년 9월(음력8월15일)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각 가정마다 제사를 올리는 시간에 괴음을 울리는 폭격기가 요란할 때 패잔병들은 위천을 통과하여 북상방면으로 도주하고 일부는 마리 장풍 당산 무월 등지를 통과하여 고제방면으로 패주하였다.
동란이 종식단계에 있을 무렵 치안이 점차적으로 회복단계에 있을 때 본 상황을 보고 차 당시 위천 우체국장인 유소감은 부산체신청에 업무 보고 차 화물차에 편승하여 안의바래기 고개근처에 다다를 즈음 패잔병들이 잠복하고 있다가 불시의 기습으로 순직을 당하였으며 당시 면장이었던 이상실이 주관하여 면민 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6. 패전병과 면민 수탈사건
1950. 9.28수복으로 말미암아 패잔병들은 더 이상 퇴로를 상실하였다. 갈 곳이 없는 패잔병은 덕유산과 금원산 등지에 은거하면서 야간을 틈타 인근 마을에 내습하여 양민을 약탈하였다.(주·부식, 가축, 의류, 생활물자) 이 사건이 하루 이틀에 걸쳐 반복된 것이 아니고 수년 동안 되풀이 되면서 면민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없었다.
금원산에 산야초 및 약초를 채취하려 입산하였다가 적에게 포박되어 정보원이란 누명을 씌워 학살을 일삼아 참사를 당한분도 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청장년들을 소집하여 향토를 방위하기 위한 단체가 전투대와 의용경찰이었다.
전투대원과 의용경찰대는 각 마을 단위로 적의 내습이 우심한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여 경계근무토록 하였으며 특히 야간에는 잠복근무 조를 편성하여 잠복 중 전투로 말미암아 순직한 분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의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월성초등학교에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군관학교를 설치하고 청장년들을 납치하여 교육을 실시하여 그들의 선발대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1950.11.20적의 2차 내습으로 인하여 면 전역을 강점하고 본 면 일부지역에 현물세를 징수하고 면민의 재산을 약탈하였으며 경찰지서를 2차로 방화한 사건이 11.20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