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1구

황산1구는 어나리, 큰땀, 안골, 서재, 각골 등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으로는 호음산 서쪽으로는 중구들 남으로는 척수암 동으로는 광대골 등이 서로 서로 산맥과 들이 연계 되면서 마을을 보호하고 있는 5백여 년의 전통을 가진 민속 마을이다.
▸어나리(院下里) : 구연서원 아래에 있는 마을이므로 생긴 이름이다. 달빛아래 수승대에서 척수대로 흐르는 냇물과 냇가의 흰 돌이 은하수 같이 비치므로 은하리(銀河里)라고도 하였고, 물고기를 잡는 곳이라 어천(漁川)이라 쓰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갓골 : 마을 북서쪽 500m 떨어진 곳에 있다.
▸안골 : 마을 북서쪽 300m 떨어진 곳에 을을 안쪽에 있다. 거창 유씨의 묘와 묘각이 있다.
▸서재 : 어나리 북쪽 500m 떨어진 곳, 16세기l 중엽 석곡 성팽년(成彭年)이 서제를 지었던 곳으로 지금도 축대 돌이 남아있다.
▸뒷골 : 마을 뒤에 있다. 초계 정씨의 묘와 묘각이 있다. 정제안(鄭齊安)을 위한 묘각 동안재(東安齋)가 있다.
▸죽바우 : 작은 바위가 줄지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동촌과 서원 중간에 있다.
▸서원 : 학림사(鶴林祠)가 있었던 곳이다.
▸지안골(靜安洞) : 서원에서 북쪽 100m에 있다. 산속이 아늑하고 고요하며 양지바른 곳이라는 뜻이다. 창녕 조씨와 안동 권씨의 묘각이 있다.
▸상촌(上村) : 마을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하므로 “웃마을”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200m 떨어져 호음산 골짜기 어귀에 있다.
▸호음산(虎陰山 虎音山) : 마을 북쪽 뒷산으로 본 면과 고제·북상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높이 932m의 산이다. 이 산에서 남쪽으로 트인 큰 골짜기를 호음골이라 한다. 근래 골짜기를 막아서 저수지를 만들었다. 호음골 안에 옛날 절이 있었다는 절터골·성골·용당골·큰골·소짝골 같은 작은 골짜기들이 있다.
▸수승대(搜勝台) : 덕유산에서 흘러내리는 위천 맑은 물이 황산 마을 앞에서 높이 10m 너비 50㎡의 거북 모양의 큰 바위를 가운데 두고 감돌아서 거북못을 이루는데 이 바위를 수승대라 한다. 옛날에는 수송대라 하였고, 백제와 신라 사이으 사신을 전송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1543년에 퇴계 이황 선생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하며 주위의 경치가 빼어나게 좋고, 바위에는 “퇴계 명명지대·갈천장구지대·요수장수지대”라는 글과 여러 시인 묵객과 들난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008년도에 국가명승지 제53호로 지정되었다.

▸구연서원(龜淵書院) : 구연동 수승대 동쪽에 있다. 중종 20년(`694)에 세워서 신권(慎權)·성팽년(成彭年)을 모시다가 순조 8년(1808)에 신수이(慎水彛)를 함께 모셨다. 뜰에는 서원 사적비와 신권을 기리는 산고수장(山高水長) 비가 있으며, 정문은 관수루(觀水樓)라 하며 영조 16년(1740)에 세우고 현감 조영석(趙榮祏)이 기문을 짓고 부사 김인순(金麟淳)이 누액을 썼다.
▸요수정(樂水亭) : 구연동 수등대의 서쪽에 있다. 요수 신권이 1542년에 구연재와 척수대 사이의 물가에 세워서 학문을 가르쳤는데 임진왜란에 불타버렸고, 다시 물에 떠내려가고, 1805년 지금 자리에 다시 세웠다. 해묵은 솔, 큰 바위, 맑은 물이 어우러져 좋은 경치를 이루고 많은 글귀가 남아 있다.

▸척수대(滌愁台) : 수승대 남쪽 물가에 잇는 거북모양의 큰 바위이다. 깊은 물과 짙은 솔이 경관을 이룬다. 요수동문(樂水洞門)이라는 일정 표현태(表鉉台)의 글이 새겨져 있다.

▸정려 : 신성진(慎性眞)의 효행을 기리서 세운 정려각 이다.
▸효열정려 : 신성열(慎性烈)과 그의 아내 진양 강씨 부부의 효행과 열행을 기려서 고종 20년(1883)에 정려를 내렸다. 영의정 김병국이 글을 짓고 현감 홍영주가 썼다.
▸신동건 효자정려 : 신동건(慎東建)이 아버지가 아팠을 때 손가락을 자른 효행으로 고종 29년(1892) 5월에 정려를 내렸다. 처음 국도변에 있던 것을 구연동으로 옮겼다.
▸열녀 안동권씨 정려 : 신재주(慎在周)의 아내 안동 권씨의 열행을 기려서 철종 5년(1854)에 정려를 내렸다.
▸취한당(就閑堂) : 황고 신수이가 숙종 39년(1713)에 세워서 가르치던 곳이다.

▸호음재(虎音齋) : 효행으로 사헌부 감찰을 증직받은 신성열(慎性烈)을 위한 재실이다.
▸괴음재(槐陰齋) : 마을 동쪽에 있다. 삼괴당 권시민(權時敏)을 위한 제각이다.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다.

▸야천정사(夜川精舍) : 구연동 수승대 남쪽에 잇다. 야천 신복진(慎復振)이 가르치던 곳이다.
▸황산리 신씨고가 : 1927년에 세운 집으로 짜임새 잇는 전통 한옥이다.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신권(慎權) : 호는 요수(樂水) 연산7년(1501)에 나서 구연서당을 지어 제자를 가르치다가 선조 6년(1573)에 세상을 떠났다. 학덕으로 추앙받아 구연서원에 모셨다.
▸신복행(慎復行) : 호는 청송당(聽松堂) 중종 28년(1533)에 나고 학덕과 효행으로 정충사에 모셨다.
▸신복진(慎復振) : 호는 야천(夜川) 중종 31년(1536)에 나서 학덕과 효행으로 화천서원에 모셨다.
▸남정정사(藍汀精舍) : 황산 마을에 있다. 남정 신종식(慎宗軾)이 가르치던 곳이다.
▸성팽년(成彭年) : 호는 석곡(石谷) 중종 35년(1540)에 출생, 병마사 성윤동(成允仝)의 손자이며 갈천 임훈의 문인으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진왜란 때에 창의하여 지평을 증직 받았으며, 구연서원과 숭덕사에 모셨다.
▸함양재 : 위천면 황산리 765번지 요수정 바로 옆에 있다. 서기1541년에 요수 신권이 세워 서고 겸 강학하던 곳이다. 우거진 노송 속에 요수정과 함께 운치를 이루고 있다.

▸신경직(慎景稷) : 선조 34년(1601)에 나서 인조 11년(1633)에 진사, 선교량을 지냈다.
▸신수이(慎守彛) : 호는 황고(黃皐), 도학이 높았고 무신난 뒤에 수습책을 건의 했으며 영조 44년(1768)에 작고하니 1808년에 구연서원에 모셨다. 지금의 황산 마을을 처음으로 열었다.
▸신인명(慎認明) : 영조 41년(176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처음 이름은 인명(仁明)이라 했는데 영조가 가꾸었다고 한다.
▸황강재(黃岡齋) : 유회항(劉會恒)을 위한 모각으로 1937년에 세웠다.

▸신병우() : 헌종 6년(1840)에 나서 고조 7년(1870)에 문과급제, 1884년 갑신정변 때 대궐에 입직했다가 유탄으로 절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