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비판(碑版)
4. 유명조선국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역양정선생 신도비
위천면 강천리 산6-1번지 역골동네 뒤 산기슭에 있다. 초계인 역양 정유명의 신도비로 영의정을 지낸 김유가 글을 짓고 형조판서 오준이 글씨를 썼다.
역양 정유명은 문간공 동계정온의 아버지로 일찍이 생진을 하였고 임진란 때는 창기의려 하였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정려한 충효겸전하신 분이다.

역문 유명조선국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역양 정선생 신도비명 아울러 서언을 붙인다. 지난 계축년 옥사가 일어났을 때 흉악한 무리들이 사화를 선동하여 그 화염이 하늘을 찌르듯 했다. 이때 경상들과 사대부들은 마치 개나 돼지가 가마솥과 도마에 오른 듯 했으나 오직 부제학 정공만이 홀로 자신을 희생하여 크게 절개를 세웠다. 그 상소문을 읽을 때마다 머리가 아찔함을 금치 못하니 도리가 아님이 칼날과 톱니를 보는 것과 분명한데 과연 의의 담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의 선공행장을 보고난 뒤에야 비로소 이런 아버지에 이런 아들임을 깨닫게 되었다. 행장을 안찰해 보니 공의 휘는 유명이요 자는 극윤이며 초계가 본관으로 역양은 그의 호이다. 고려조에 휘 배걸이란 분이 계셨으니 시중광 유후가 되었고 시호는 홍문공으로 정씨가 이때부터 크게 현달되었다. 아들 휘 문은 벼슬이 예부상서에 이르렀고 그 후에도 대대로 훌륭한 분이 배출되었다. 휘 승 휘 방주 휘 공연이분들 3대는 진사에 합격했으나 은거생활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공연이 좌산기상시 습인을 낳았는데 정직하였다는 이름이 있다고 목은 이색이 전하고 있다. 상시가 보문각 제학인 전을 낳았으니 팔계선생으로 문장과 행의가 세상에 모범이 되었으며 공에게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제안으로 성균생원이며 증조의 휘는 종아인데 충주목사를 지냈다. 할아버지의 휘는 옥견이고 사포서별제로서 사헌부집의를 증직 받았다. 아버지의 휘는 숙인데 진용교위로 증승정원좌승지를 증직 받았다. 진주정씨 부사용순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고려판도판서 인득의 6세손이다. 이분이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몸가짐이 단정하였고 유희를 즐거워하지 않았으며 농담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와 달랐다. 점점 자라나면서 갈천 임선생 훈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도학이 능하니 문하인들이 추대하여 영수로 삼았다. 서기1563년에 승지공께서 돌아가시자 애통함이 예제를 벗어나 피눈물을 흘리고 죽만을 마시며 재기가 돌아와도 그치지 아니하니 두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부인께서 울면서 음식을 억지로 권하여 겨우 거친 밥을 먹었고 오랜 뒤에 눈이 회복되었다. 서기157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께서 늙으심을 생각하여 반궁에서 공부하기를 즐겨아니하고 오로지 탕약달이기를 일로 삼았다. 평소 때의 봉양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그 뜻을 따랐고 항시 무릎앞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만약에 편치 못한 기색이 있으면 근심 빛이 자심하였으니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밥을 한 수저 많고 적음에 기쁨과 근심이 따르니 내 비록 밥맛이 없어도 억지로 더 먹는다 하였다. 서기1579년에 오래도록 해묵은 병은 온갖 간병도 아랑곳없이 마침내 돌아가셨다. 이에 이르매 공은 한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하고 기절하기를 몇 번 하였으나 초종예절에는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마침 큰 흉년이 겹치어 장사를 치룰 수가 없었으나 다행히 친구가 도와 주워서 장지도 마련하고 제전도 준비되어 힘에 겨운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거처하면서 채소와 과일까지도 물리치고 싸라기 죽만 마셨으니 지난번 부친 상사 때와 같았다. 아침저녁으로 묘소에서 울음으로 슲은 마음을 다하였고 상복은 잠시도 벗어 본적이 없었다. 이해에 마침 마을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어 여막에서 수십 보 이내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까지 병에 걸리어 심히 공에게 위급하였다. 사람들이 걱정되어 공에게 피할 것을 권했으나 따를 리 없다. 오직 향불을 지켰을 뿐 피하지 아니하였다. 병이 전염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효서에 하늘이 감동한 바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을 벼슬아치(공직자)들과 부로(늙은이)들이 공의 효행을 엮어서 관에 알리고 갑자년에 방백(도지사)이 조정에 아뢰니 을미년(1555년)에 조정에서 몇 가지의 조목을 내리고 조목에 해당된 자를 고르게 했는데 공이 으뜸이었다. 또 이정승 원익이 남부지방에 체찰사로 나왔다가 그의 행실을 전해 듣고 사실을 조사하여 조정에 아뢰었다. 공이 평소에 집안일에 종사 아니하여 생활이 어려웠으나 이를 개의치 아니하였다. 손님이 찾아오면 반갑게 맞이하고 융숭한 대화로 즐겁게 대접하였으며 혹여 초청을 받으면 기꺼이 찾아가서 흥취 있게 더불어 즐기고 술도 마시며 농담도 잘했다. 살던 집이 퇴락하여 바람비를 가리지 못하고 집안이 항상 쓸쓸하였다. 정원 가운데는 두어 그루의 매화와 대를 심어 즐겼으며 평소 산수를 좋아하여 덕유산이나 지리산을 찾아다니면서 남강여옥의 취미를 살렸다. 또한 계획을 세워 벗들과 역양 시내 위에 집을 짓고 장수하는 곳을 삼으려 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완성하지 못하였다. 신병이 있어 몸이 불편하였으나 항상 용모가 단정하였으며 술도 많이 드셨으나 지나치지 지는 아니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고을이 어지러웠고 흉적의 칼날이 서울을 향하여 급진할 때 공은 나라에 충성을 맹서하고 동네 젊은이들을 불러 의병을 일으켜서 의병장 김면을 도와 활약하였으니 비록 초야에 살고 있는 몸이었으나 군부를 향한 충성심은 이와 같았다. 처참했던 난리를 치르고 난 뒤에 또 흉년이 들어 새와 쥐들에 맡기고 백성들이 추수를 포기하니 이를 타일러 하찮은 곡식들을 수확케 하고 크게 탄식하면서 굶어 죽게 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많은 사람을 구제하였으니 인자한 천성을 가히 알 수 있다 하겠다. 병신년(1596년)에 병환으로 바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임종에 이르러 아들 율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평생한일은 없으나 선조를 위하는 일에는 네가 가히 따라 지켜서 가통을 이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마지막 할 말은 가례를 배워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라 하였다. 공이 돌아가셨다는 말이 전해지자 멀고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슬퍼하고 눈물을 흘렸으며 시골 선비들은 의관을 갖추어 입고 찾아와 통곡하였다. 가정기해(1539년)3월초4일에 출생하여 만력병신(1596년) 12월초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58세이다. 안음선산아래 문주동 간좌 곤향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공의 성품이 온화하고 지조와 행보가 단상하여 충신독경으로 몸을 닦으며 모든 일에 원만하였고 관대하였다. 성부에 나아가 서지 아니하였고 항상 조심하였으며 꾸밈이 없었고, 행신에 음양이 없었다. 남의 선행에는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고 부족한 일에는 이를 감추어 주었다. 남들이 시기해도 관대하게 대하였고 착한 자는 사랑하였으며 착하지 못한 자는 가르쳤다. 의리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용서할 줄 몰랐고 칼로 치듯 단호하였다. 여러 형제가 있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자매 두 분이 남아 우애가 돈독하였다. 돌아가신 누이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양육하고 가르쳤으니 마치 자기의 소생과 같이 하였다. 벗은 구이경지로 사귀었고 종족과 향당(이웃)을 보살필 때는 완급을 가렸다. 평소 때의 일상생활은 날이 채 밝기 전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에 배알하였으며 출필고반팔면하였다.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과 도마칼등은 손수 관리하였고 정제지일에는 글을 아니 보고 성경이란 두 글자를 써서 걸었다. 스스로를 속이지 아니하고 그 혼자를 조심한다는 등의 어귀를 써서 창과 벽에 붙여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글을 읽을 때는 사서로서 근본을 삼았고, 성리학도 깊이 연구하였다. 임선생 문하에서 배우는 여러 선비들이 공에게 질문을 해 올 때마다 정확히 답하는 것을 본 임선생은 크게 칭찬하며 이르기를 정모의 학문은 나로서는 미치지 못할 바라고 하였다. 공이 갈천에게는 배우고 옥계 노선생은 종유하였으니 옥계와도 절친한 사이었다. 공이 과거에는 처음부터 뜻이 없었으나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의 권유에 따라 30여년을 과장에 종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이를 단념하고 후진양성의 길을 택하였다. 선현들의 명언을 수록하여 두 아들을 가르치니 성경이 바로 그 한조목이다. 일찍이 부제학 공에게 이르기를 ‘학문은 심신의 결정체이니 깨우치고 반성하지 못한 채 방종하면 아니 된다.’ 라고 하였다. 때에 흉년을 당하여 부학 공께서 양곡의 재고를 아뢰니 공이 깊이 생각하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이런 때는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게 함이 가장 급한 일이니 항상 의리를 생각하고 후회됨이 없게 하여야 하며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지조를 바꾸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아! 공은 자품만 거룩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도를 닦으며 스승과 친구에게 배웠고 학문을 강마함에 체험으로 진리를 터득하였으니 말로만의 도의가 아니었고 남의 말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평소에 남에게 예우 받으려 하지 아니하고 임천에 묻혀 늙어 마치니 그의 큰 뜻을 아들에게 전하였다. 후에 그의 아들이 태평성세를 맞아 어진 임금을 모시고 왕도정치를 이루었으니 공의 높은 학문지덕이 아닐 수 없다. 공이 장사랑 강근우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국자박사 계용의 후손으로 본관은 진주이다. 부인께서는 아내로서 군자를 덕으로 섬겼고 어머니로서 아들을 의리로 가르쳤으며 생 사 화복에 희비를 더도 덜도 하지 아니하였으며 도덕군자로도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방가위지 양공의 아버지에 문백의 어머니와 같았도다. 공보다 35년 후에 세상을 떠났으니 부학공이 녹봉한지 8년만으로 춘추가 93세였다. 거창가조의 용산 자좌오향의 언덕에 별장하였다. 아들 부제학의 벼슬로서 공에게 이조참판을 증직하였고 숭정계유(서기1633년)에 예조에서 위에 아뢰어 효행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또한 고을에서 존경하고 사모하여 사우를 건립하고 향사를 드린다. 명사에 이르기를 옥을 갖이 옥덩이 젖줄이 돌이요 옥 덩이 쪼고 갈아 박옥을 만드나니 옥이건 옥 덩이 건 역양의 빛이로다. 그 미를 헐지 않고 그 장함 간직하고 영원토록 간직하며 진실로 간직하며 옥이며 박이며 온전하게 보전하여 후인들에 물려주오. 승평 부원군 김유 짓고 형조판서 오준 썼으며 이조판서 김광현 전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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