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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유현(19명)
신수의(慎守彛)
선생의 관향은 거창이며 자는 군서 호는 황고라고 세인들이 일렀다. 요수신권의 5대손으로 서기1688년에 출생하였다. 도암 이재를 스승으로 뫼시어 성연의 학문인 정주학을 탐구하여 위학이 널리 군서에 달하여 남주의 대표라 하였다. 송운평과 송역천 제현과 강마도의 하였고 수신제가와 불우이웃 구휼에 힘쓰니 감사가 나라에 상주하여 미육이 내렸으나 이를 반납하고 도백과 어사가 천거하여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서기1728년 무신난 때는 도순무사 오명항에게 건의하여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을 막았다. 이때 선생은 말하기를 반둔 들이 일어나면서 스스로 의군이라 이르고 백성을 괴롭히는 못된 벼슬아치를 몰아낸다 하니 주민들은 좌우를 분간 못하고 반군에 가담한 것이니 그 사정을 크게 참작하라하였다. 그것이 사실로써 수용되어 많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게 하였다. 선생은 평생을 초야에 묻혀서 학문에만 몰두하였기에 많은 저술을 하였고, 이것이 황고문집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선생은 향약서 에서 강조하기를 향약은 이풍역속의 도구이다. 건전한 풍속으로 이끄는 좋은 도구이니 백성은 믿음을 가지고 입약 입민 해야 한다고 강조 하였다. 선생은 천품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여 화림지 효행 편에 수록되었고, 그의 선조 승훈공이 안의 입향 이후 대대로 수승대 옆에 살다가 그의 부친이 상천마을로 옮겼으나 선생이 다시 황산 중고 평에 신기를 잡아와서 자기 처소를 취한 당이라 하여 자호로 삼았다. 수승대 아래 흙을 모아 솔을 심고 뿌리를 내리게 하니 이것이 지금의 섬솔 이다. 선생은 평생에 조금의 실수도 없었으며 오직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하다가 서기1768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1808년에 사림들이 그의 도덕을 기려 구연서원에 추향하였고, 원정에 그의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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