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천면 황산리 769번지 구연서원 원정에 있다. 황고 신선생을 기리는 비로 화산 권용현이 글을 지었고 우봉 이병희가 글씨를 쓰셨으며 1962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처음에는 서원 서쪽 담장밖에 건립하였는데 후에 서원 뜰 앞으로 옮겼다.
선생은 일찍이 수신제가를 다졌고 도학이 높았으며 무신난 뒤에 무민책을 건의하였고 향민 교화에 힘썼다. 서기 1768년에 세상을 떠났고 구연서원에 향사하였다.

역문
황고 신선생 유적비
자고로 현인군자가 산속에 은거하여 공업은 비록 당세에 나타남이 없으나 오직 그 덕을 몸에 닦고 가르침이 후세에 행하면 그 유풍과 여운이 근원에 입어 더욱 오랠수록 없어지지 아니하여 수백세의 후라도 그 유풍을 듣는 이 노래하고 생각하여 흥모하거늘 하물며 그 은거하여 서식하던 곳과 뜻을 구하고 학문을 강하던 유적을 찾아 민멸하리오. 이는 정부자안락정시에 물은 폐할 수 없고 황폐할 수 없으니 오호라 정학을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황고 신선생은 남주의 대표이시다. 집안으로는 요수선생의 후손이요 연원으로는 도암 이선생의 높으신 제자라 그 출생하실 때 이상한 징조가 있고 또 선세의 빛을 닮아 어려서 치학으로 부터 옛 법을 따르니 사람들이 소학동자라 칭하다. 또한 장성함에 명도에 뜻을 끊고 위기의 학문에 전심하니 그 위학이 널리 군서를 다하되 돌이켜 몸과 마음을 단속하니 연리는 정미하게 연구하되 정자주자를 따르고 지기는 법도가 매우 엄하여 조금의 실수가 없고 존심은 유은을 반드시 살펴 순간의 나태함이 없고 치지와 역행에 그 공을 다하여 오래 힘을 써서 덕기가 혼성하니 온후하고 화평한 가운데 스스로 엄정한 기운과 박실한 땅이 있어 자연히 소광의 경지에 이르다. 또한 도암의 문에 오르니 도암이 대유로 허락하여 그 사석을 양보하고 벗이 와서 선을 같이하자는 말로 시를 지어 화답하여 깊이 상득의 뜻을 이루니 명망이 날로 높아 일시의 명유석덕들이 다 마음이 쏠여 사귀기를 원하니 송운평과 송력천 제현도 혹 서신을 보내고 혹 자주 심방하여 도의를 부탁하니 이는 그 조도성덕의 실상이요 제행이 매우 높되 더욱 효가 돈독하여 친환에 하늘에 빌고 손가락을 끊은 정성과 어름의 고기와 눈속의 쑥 같은 이감이 있고 거상에는 묘려하여 진례하기를 전후 육년을 같이하고 선조를 받들고 가정을 단속학 친족에 화목하고 이웃 구휼하기에 다 마땅함을 얻으니 감사가 독학과 진효로 나라에 올려 미육이 나리니 글을 올려 반납하고 또 도백과 어사가 천거하여 동몽교관에 제수되나 나가지 아니하니 이는 그 행의의 들림이요 후학을 권장하여 순순히 가르쳐 많은 선비가 본받아 고을이 그 덕의를 입고 정희량의 적변에 고을 사람을 순역의 분간을 깨우쳐 구제한바가 많고 또 치옥에 있어 법관을 타일러 주동 외에는 석방하도록 하여 만여 인명을 살리니 이는 그 공화의 미친바라 몰함에 사림들이 요수선생의 구연서원에 모시고 후에 또 열읍에서 일어나 도암과 역천과 선생을 동춘선생 성주서원에 추배하기로 했으나 나라의 금지로 못되었으나 공의만은 알 수 있다. 당초 신씨의 선조 요수 부친 승훈공이 안의 수승대 옆에 복거 하였다가 선생의 부친이 상천촌으로 이거하였는데 선생이 다시 황산 중고평으로 옮기니 대개 구연과 수승대와 요수유적이 가까움이다. 선생이 일찍 자기 처소를 취한당이라 하여 우유자적의 뜻을 부치고 또 서원을 중수하여 사방의 학자들로 이에 강학하고 솔을 수승대 아래 심고 흙을 거적에 담아 그 뿌리를 도두니 지금까지 석송이라 한다. 그 소감의 시에 옛 솔은 이미 늙고 새로 심우믄 한길이 된다하니 심고 가꿈의 근고함을 보리로다. 지금의 욕기암과 풍우대와 영기정은 다 선생의 이름한바다. 대개 구연과 수승대의 한 나무 한 돌이 다 요수의 장점한바요 선생의 애호하고 사모한 바라 그 정신과 풍범이 이에 있지 않고 졸하시어 또 이 서원에 배향하니 후인들이 상상하고 흥모함이 더욱 이에 있다. 도리켜 보건데 이제 천하가 대란하고 유택이 멀어져 산돌 물가에 거인과객들이 무디 무디 지적하고 의심하여 점차 당일의 훌륭한 사실을 잊어진다. 종족 민성이 제족과 같이 이를 슬퍼하여 대비를 세워 그 사적을 기록할 새 태성 현성이 유집을 안고 와서 나의 글을 청하니 나 높이 사모한지 오래라 의에 사양할 수 없어 그 대강을 위와 같이 쓴다. 선생의 휘는 수이요 자는 군서니 삼자 인명 한원의 시종은을 미루어 통정계자에 첨지중추부사가 내리다. 숙종무진과 영종무자는 공의 생졸년이요 그 세계원류와 내행의 상세함은 사천 김 문간공과 매산 홍문경공의 행장과 용전 송공의 묘비명에 갖추었으니 다시 쓰지 않는다. 명왈 공이 용을 타고 평연히 내려오니 원산이 높고 학수가 쏟네. 기다름이 있는 듯 영구가 열렸네. 이에 즐거워하니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조가 있어 계술하니 구연이요, 사가 있어 족학하니 한천이라 이에 흐름을 따라 근원을 찾으니 정자 주자로부터 율곡 우암으로 내로네 내 옷이 알맞고 내 패물이 기네. 어찌 진흙 같은 벼슬로 깨끗한 옷을 더럽히리오. 대상에 바람 쐬고 냇가에 목욕하네. 천길의 나는 봉이 홀로 초연하네. 초복의 정채가 지금까지 유전하네. 누가 리택이 널리 없다 하는지 산은 푸르러고 물은 깊이 흐르니 선생의 유풍이여 가히 잊지 못하리. 임인 맹하 화산 권용현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