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수루(觀水樓)는 수승대 구연서원의 문루(門樓)이다.
지 정 일 : 2005.01.13
소 재 지 :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769번지
시 대 : 조선시대
요수 신권선생이 1540년에 구연재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1573년 그가 작고하자 사림이 구연 서원을 세우고 석곡 성팽년 선생과 함께 배향했다. 관수루는 서기 1740년에 사림이 세웠고 현감 조영석(趙榮䄷)이 명명(命名)기문하였으며 부사 김인순(金麟淳)의 루액이 있다.
『관수(觀水)』란 맹자 진심장구 상편에 “물을 보는 데(觀水)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여 선비의 학문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
누각에는 1743년에 함안 조영석(趙榮祏)이 지은 <관수루기>,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 함안 조영석(趙榮祏)의 <관수루>, 1808년 김인순(金麟淳)의 <삼가 관아재 운을 빌어(謹次觀我齋韻)>, 경자년 옥천 진사 임철한(林撤漢)이 지은 <관수루>·<수승대>, 월성 김동준(金東準)의 차운시, 병오년 신병교의 차운시, 1966년 문재근(文宰根)이 지은 <삼고 산고수장비의 운을 빌어(謹次山高水長碑韻)>, 기미년 신태도(申泰道)가 지은 <판상 운을 빌어 두 수를 짓다(次板上韻二首)>, 일족 후손 용성(用晟)과 일족 후학 종립(宗立)이 지은 <삼가 황고선생 운을 빌어(謹次黃皐先生韻)>, 경술년 12세손 홍성(鴻晟)이 지은 <삼가 관수루 운을 빌어(敬次觀水樓韻)>, 요수 11세손 종현(宗賢)이 지은 <수승대 유감(搜勝臺有感)>등의 판상시가 걸려 있다.
누각 규모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에 계자난간을 둘렀고, 팔작지붕 형태에 네 처마를 활주로 버텼다. 누각 1층은 구연 서원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의 구실을 하고 있다.
수승대를 들어서서 이 문루를 지나기 전에 “요수 신 선생이 은거하여 수양하던 곳(樂水愼先生藏修之地)”이란 편액에서 보듯이 이곳은 거창신씨 문중의 역사를 전하는 곳과 다름없다.

족보를 상고하면 거창신씨는 북송 신종 때(1086) 고려 문종조에 귀화한 신수(愼修)를 시조로 삼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왕비와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요수 신권(愼權)은 이곳에서 심신을 수양하며 중종 35년(1540) 구연재(龜淵齋)를 지어 제자를 가르쳤고 이듬해 함양재(涵養齋)를 지었으며 그 이듬해 요수정(樂水亭)을 지었으니 1542년이었다. 1573년에 그가 죽자 사림이 구연 서원을 세우고 석곡 성팽년(成彭年)과 함께 배향하다가 영조 16년(1740)에 관수루를 세우고 순조 8년(1808)에 요수의 5대손 황고 신수이를 함께 추향했다.
누각 주위의 경관은 안의현의 삼동 중에서 원학동이 가장 으뜸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우며 물과 솔과 누각․정자가 어우러져 찾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거창의 대표적 명승지이다.
특히 거북모양을 한 대위에는 스무나무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고, 솔바람을 맞으면서 주위 경관을 구경하노라면 저도 모르게 도인이 된 기분이 들며, 대 아래 ‘구연’이란 연못은 푸른 물이 고여 있어 관수루의 의미를 한층 깊게 해 준다.

관수루기 역문
구연서원이 수승대 옆에 있으니 큰 시냇물이 띠같이 휘돌아 한 고을의 아름다운 곳이 되니 곧 요수 신권(愼權)선생과 석곡 성팽년(成彭年)선생을 배향한 서원이 있다. 경신년에 제생들이 서원 남방에 루를 지어 봄․가을 강습의 도장으로 하면서 이름을 나에게 묻고 또 글쓰기를 청하니 내가 루에 관수라 썼더니 지금 서원의 선비들이 또 와서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이름을 짓고 글씨를 썼으니 원컨대 또한 기문을 지어 후세에 참고토록 하라 하니 내가 사양할 수 없어 이에 말하기를 맹자께서 말한 관수(觀水)의 뜻을 제군들이 이미 알고 있으니 나 또한 무슨 말을 하리요만은 제군들이 이 고을에 있으면서 마땅히 양 선생으로 법을 삼아야 한다.
내가 살피건데 요수선생은 덕기(德器)가 천성(天成)이여서 아주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어버이 명을 따라 과거에 응시했다가 불리하여 지난 뒤에 탄식하기를 “인작(人爵)은 사람에 있고 천작(天爵)은 내게 있으니 어찌 내 것을 바라고 다른 사람에게 구하리오.” 하고 이에 문을 닫고 글을 읽어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여 남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사친봉제를 극진히 하되 옛 현인에게 부끄럼 없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살피면서 항상 부족감을 느꼈다. 학문에 있어서는 체(體)를 밝히고 씀씀이를 알맞게 하여 자신의 기만이 없고 혼자일제 삼가 함으로 중요함을 삼고 나이 칠십이 넘어도 엄경(嚴敬)으로 몸을 단속하여 일찍부터 해이함이 없었다. 선생이 계시는 곳에 수석의 승이 있어 요수로 재를 이름하고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었다.
석곡선생은 정동계(鄭桐溪)가 그 전함에 이르기를 공은 총명하고 강기하여 많은 책을 다 읽었고 모병(母病)에 기도문을 지어 대신하기를 원하고 남매간에 우애하여 사람들의 이간이 없었다. 용모가 해맑아서 맑은 물이 부용같고 타고난 성질이 엄격하여 행의가 준결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공은 가끔 나는 사람이라 그 재주는 큰 벼슬로 도를 세울 것이요 그 뜻은 구집을 물리치고 맑음을 들춤이라 하였으니 요수․석곡 양 선생 학문의 돈독함과 행의의 높음은 어찌 원천의 근원이 있다고 말 못할 손가.
이제 이물 실로 그 당일에 표주박으로 마시고 갓끈을 씻든 물인즉 군자가 일찍 그 형상을 봄으로서 항상 그 득을 사모함이 이로서 가히 증험함이라 그 막힘없이 통하고 두루 퍼져서 이치의 인연으로 행함은 곧 신선생의 인작을 버리고 천작을 치함을 알게 될바요 이물로 즐거움이로다. 저 깊음을 도도하게 의심 없이 천리를 감은 또한 선생이 구도에 용맹하여 늙도록 쉬지 아니함이라 대개 가을 물결이 맑고 맑아 잔재 없이 더러움 제함 같음은 성선생의 맑은 자품과 준결한 행동으로 탁함을 멀리하고 맑음을 취하는 그의 뜻을 또한 가히 표현함이다.
이 물은 산골로부터 발원하여 암석을 흘러 한․수해를 당하여도 덧없이 흐르는 물로서 그 천리(天理)로 따를 뿐 모두 안류로 받아들이고 그 법도를 잃지 아니함은 양 선생이 함께 산림 속에 살면서 불만 없이 편안히 도덕을 숭상하였으니 이 루에 올라 물을 보는 자는 그 착한 바를 본받아 양 선생의 높은 교훈의 구함을 얻은 것으로서 빈유의 뜻을 버린 후에 정하게 생각하고 익히 글 읽어 모름지기 역을 물리치고 매사에 과격하지 말라. 그 이치를 얻으면 학문에 밝고 행실이 높아지며 덕이 길고 업이 커서 마침내 원천서 흘러 사해에 도달함과 같은 것이니 가히 관수에 얻음이 많으리라.
혹 말하기를 그대의 말씀이 맹자와 같지 아니하니 어찌 주자의 옥산강의에 치우친 것이 아닌지요. 내가 말하기를 그 고을의 선달과 학자들이 힘쓰는 것은 대개 그 풍성과 풍속으로 인도하고자 함이라 실지를 숭상하고 순서 따라 점진한 뜻이 거기에 있음이라 하노라.
숭정기원 160년 계해 단양 후학 함안 조영석(趙榮祏) 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