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리 정안동 괴음재 앞에 있다. 노천선생 권건은 안동인 삼괴당 권시민의 증손으로 행의가 단정하였고 학문이 깊어 향중의 존경을 받았다. 권옥현이 글을 지었고 권여현이 글씨를 썼으며 서기1986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역문 노천선생 안동권공 배유인 청주경씨를 부한 묘도비 나의 종선조 노천부군은 명종신해에 나시어 목능을사에 졸하니 향년이 겨우 오십오로 계양동 간자에 장사하였으니 곧 증왕고인 삼괴당 선생의 묘후이다. 상금 표석을 이룩하지 못하였던바 후손 해성 재명 해영 태인이 힘을 합하여 석역을 할 때에 유집과 정청하 기윤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옥현에게 비문을 청하니 아아 부군은 우리 종중의 자랑스러운 어른이다. 유집을 발간치 못함을 내 스스로 한 한지 오래며 또한 이번 역사를 알고도 돕지 못하였으나 행장과 유집을 근거할 수는 있겠지만 부족함을 탓하며 어찌 사양하리오. 삼가 살피건대 부군의 휘는 건이요 자는 청지이며 노천은 호이다. 고의 휘는 여눌이요 호는 묵재이고 조의 휘는 일이며 호는 일신정으로 호조정랑이며 증조의 휘가 시민으로 즉 성균지사 삼괴당이니 우리 권씨의 세계덕이 선생의 비갈명에 자상히 적혀 있다. 외조는 충순위 창녕 성한준이요 배위는 청주경 대림의 따님으로 부장하였다. 이남을 두었으니 장은 극효로 계공랑이며 차는 극신이고 손과 증손이 몇몇 있다. 부군은 천품이 준수하고 총명하여 어릴 때 학당에서 하나를 듣고 셋을 깨달아 많은 칭송을 받은바 있다. 오경의 낙민지서로 학문을 강마하였고 하락태극 두 그림을 벽에 걸어 심지를 맺고 효우를 돈독히 하며 평생을 글과 함께하여 애경으로부터 백가지에 이르기까지 주문공의 가례에 의하였고 때에 따라 집을 꾸렸다. 강릉에 출행해 있을 때 임진란을 당하여 돌아오는 도중에 어가가 옮겨지고 능(陵)이 변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의 시율을 지어 충성스러운 분을 금치 못하였고 또 한 정유재란을 당하여서는 도체찰로 여러 향민에 분부하여 함께 황석산성에 들어갔으나 성이 함락되어 원한의 절규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그때 경씨 부인도 같이 있었으며 가족 10명이 화염에 쌓였으나 공은 의연하게 글로써 적을 퇴각케 하였으며 조 곽 두공은 부상자를 이동시켰으니 한나라 제갈과 당나라 수양과도 같았다. 일찍이 임갈천과 노옥계 두선 생을 찾아 배웠고 정한강에게 왕배하여 현덕으로 사귀어 학문에 뜻을 이루었고 정동계 선생과 서로 의지하며 종신지교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남에 동계선생이 조문지어 가로되 총명하고 너그러운 자태에 자상하고 개제의 덕을 겸하였도다. 존현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성에서 나오고 애우(愛友)는 막언 아니함이니 일찍이 의귀를 알아 갈천 옥계의 문호에 분주하였다. 가세도 넉넉하고 스승과 벗도 근하였건만 하늘이 그 수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55세의 수명을 독촉하였으며 복은 선의 이치인데 이 불행이 웬일인고 슬프구나. 그 사람을 알려면 먼저 그 벗을 보라 하였으니 이제 부군을 알려거든 이로써 그의 칠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우와 학문의 깊이를 보면 흔한 선비가 아닌데 어찌하여 수명하나 못했고 가업 이루지 못하여 후가 쇠잔하랴. 동계가 한탄한 복선의 이치가 어찌하여 이러할까? 그 모습과 그의 덕을 뵈옵지 못한채 다만 행장만 보고 비에 옮기니 이가 노천선생의 묘임을 알린다. 단기 4319년 병인 2월 일 족 후손 옥현 삼가짓고 족 후손 여현 삼가 씀. 13대손 해성 11대손 재명 14대손 병근 14대손 종근 13대손 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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