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는 무신사태를 이인좌(李麟佐)의 난 또는 “무신난”이라 하고 우리고장에서는 “양란(亮亂)”이라 고도 하고 “정희량(鄭希亮)”의 난리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의 양반사회가 16세기 말기에 이르러 동서분당을 계기로 사대부계급이 분열되어 서로 항쟁하다가 마침내 당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급기야 18세기 초에는 내전으로 까지 발전 되었다.
서기1728년인 영조무신년에 당시 정계에서 버림받던 소론일파와 오래도록 세력을 잃고 있던 남인일파가 서로 기맥을 같이하여 이인좌(李麟佐)는 충청도에서 박필현(朴弼顯)은 호남지방에서 이사성(李思晟)은 평안도에서 서울에서는 이하(李河)와 남태징(南泰徵) 등이 영남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이 조성좌(曺聖佐)와 더불어 기병하여 영조와 노론 정권을 타도하고 밀풍군(密豊君)을 임금으로 추대코자 했던 일대 사건이었다.
이때의 주동 인물이 충청도의 이인좌와 이 고장 출신 정희량으로 그의 본명은 정준유(鄭遵儒)이다. 그는 인조 때의 명신 정온(鄭蘊)의 증손인 진사 정중원(鄭重元)의 둘째 아들로서 풍모와 재질이 출중하였다. 초계정씨 족보 상계 편에 의하면 준유(遵儒)가 아닌 준유(樽儒)로 세칭 희량(希亮)이라 하였으며 영조무신에 의거했다 하였고 맏형은 찬유(纘儒)로 숙종임진인 서기1712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선대인 중원(重元)은 영조병오인 1726년에 졸하였고 조는 기수(岐壽)요 증조는 창시(昌詩)이며 고조가 동계 온(桐溪蘊)이다. 그리고 형 찬유는 아들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는 의호(宜瑚)로 숙종병신인 1716년에 졸하였고 둘째가 의련(宜璉)으로 재주가 있어 무신년에 생원이 되었으나 그해 화를 입었고 갑신(1704년)생이며 정유(1777년) 졸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준유의 삼종(8촌)인 정관유(鄭觀儒)가 합천의 조성좌(曺聖佐)와 남매간이며 정씨 보에는 없으나 진양속지충의 편에 의하면 정희량은 조성좌의 11촌 숙(叔)인 조숙(曺淑)의 사위였다 하였고 영조실록에 의하면 영조4년4월9일조에 영남안무사 박사수(朴師洙)가 역적 정희량의 조카 정의련(鄭宜璉)과 아들 정의황(鄭宜璜)을 잡아 보낸다고 장계하였으니 희량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무신 란은 3월15일에 처음 이인좌가 소사(素沙)에서 일어나 청주(淸州)를 비롯하여 목천(木川) 청안(淸安) 진천(鎭川) 등을 장악했으나 3월22일에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의 관군에 의해 평정되었고 두 번째로 3월21일에 정희량이 그의 향지인 이곳 고현에서 기병하여 안음 거창 합천 삼가 함양 등 5개 고을을 석권하였으나 4월3일에 드디어 종말을 고하였다. 이로 인해 안음현은 혁파되었고 역향(逆鄕)으로 몰린 현민은 고려조 감음부곡 때와 같이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
그러나 이 고장에는 “역량지변(逆亮之變)”이란 말과 황고집(黃皐集)에 선무약기(宣撫略記)만 전해질 뿐 상세하고 신빙성 있는 자료를 얻지 못하여 그 전말을 거창군사에 따랐다.
정희량이 안음현감 오수욱에게 보내어 기병의 목적과 자기네들에게 협조하라는 내용의 글은 아래와 같다.
정희량의 격문
국운이 기울고 비색해서 병민이 사방에서 움직이니 종사가 장차 위험하기가 마치 불이 처음 타서 그 기세가 반드시 모두 태우고야 말 것과 같습니다. 이 같은 때에 누가 있어 한 꾀를 내고 한 책략을 내어서 나라를 위한 길고 큰 생각을 가질 것입니까? 웅보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고 있으니 편안함과 근심을 같이 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마땅히 온 힘을 다하고 감정을 발해서 위로는 종사를 평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생민을 보호하려 합니다. 이에 3월 20일 동지 한두 사람과 더불어 의로운 군대를 규합하여 사직을 위한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혹 충성스러운 마음이 좌우에 알려지지 못해 폭란의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진심으로 염려하여 이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오니, 잘못을 용서하여 이 일을 이룬 즉 종사의 행(幸)일까 합니다.

거창장날 장꾼들이 희량군 쪽에 동조하자 공조 이술원이 관문에 방을 붙였다.
방
희량이 대역적임은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다 아는 사실임으로 나는 군교를 이끌고 이들을 주멸해서 신인의 분을 없이할 것이다. 만일 본현 인민으로서 적중에 투입되는 자는 군율에 의하여 목을 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