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천면 황산리 239번지 황산마을 뒤 정안동 어귀에 있다. 서기 1780년에 세워 삼괴당 권시민(三槐堂權時敏) 죽헌 조숙(竹軒曺淑) 박약재 강위용(博約齋姜渭龍) 금천 류세홍(金川柳世泓) 원암 곽인(猿岩郭訒) 난곡 우석일(蘭谷禹錫一)등 육 선생을 병향하였다.
1868년 국령에 의하여 훼철됨에 본당과 사우 등은 파옥되고 전사청만 남아 있다가 뒤에 문간채를 새로 세워 현존한다.
훼철과 동시 향사는 드리지 아니하고 매년 음력 4월13일에 후손들이 모여 회집을 한다.

학림서원기 역문
저 안음의 황산에 옛적에 학림서원이 있었으니 고을 선생 삼괴당 권시민(權時敏)과 죽헌 조숙(曺淑)과 박약재 강위용(姜渭龍) 금천 류세홍(柳世泓) 원암 곽인(郭訒) 난곡 우석일(禹錫一) 육현을 향사하던 서원이다. 그 창건은 숙종기해년이요 고종 을축에 국령으로 훼철하였고 지금 그 터에 잡초만 무성한지도 이미 수십 년이 지나갔다. 왕년에 육현의 후손들이 합력하여 비를 세웠는데 동강김공녕한(東江金公寗漢)이 비문을 지어 유허를 드러냈고 또 옛날 조씨의 분유였던 원무를 다시 사서 새롭게 하고 학림서원이라고 현판을 걸었다. 대저 땅과 물을 차마 황폐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안락정(顔樂亭) 시의 뜻이요 또 후일에 욕례의 혹 회복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용현(龍鉉)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지어달라고 한다. 용현이 극히 생각건대 선비는 나라의 원기요 강상과 도덕은 세상을 유지하는 기둥과 대들보이다. 이것이 없다면 사람이 사람 아니요 나라가 나라아니다. 선철의 착한 덕이 있으면 조두를 드리며 높이 받드는 것이 그 사람을 사사로이 후하게 하여 헛된 예를 더하는 것이 아니요 그 도를 높이고 그 학을 중하게 여겨 사기를 격려하고 세도를 유지하는 것이므로 성왕이 중하게 여기고 선비들이 흥기하더니 그 말류에 이르러 실지를 잃고 허문만 숭상하여 폐단이 없지 않으므로 서원 훼철령이 내린 것이다. 세도의 망극함은 말할 수 없으며 이천께서 피발이라고 하신 것보다 더 심한 시대라 하겠다. 오호라 허와 실의 지음에 그 기미의 엄한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개탄하지 않겠는가. 삼괴당의 연원이 바른 성리의 학과 세상에 숨은 고상한 뜻이며 죽헌은 경서를 밝히고 행실을 닦으며 곧은 도로 임금을 섬겼으니 박약재는 사우와 강마하고 경학을 밝히셨으며 금천은 행실과 학문이 다 성하여 순국한 곧은 충렬이며 원암은 아름다운 자질과 돈독한 뜻이며 역격의 심오한 이치를 깨달았으며 난곡은 효행이 조정에 전해졌고 예를 분별하여 간사한 무리를 배척한 것이 다 강상과 도학의 중함을 위함이라 당시에 법이 되고 후세에 빛을 드리웠으니 이러므로 옛날에 높이 받든 것이다. 오늘날 이 서원에 일이 있는 자 진실로 그 도를 강하고 그 학을 밝히며 높이 우러러 사법한 즉 비록 조두의문은 급히 회복하지 않더라도 그 높이 받드는 실지에는 해로움이 없을 것이요 또 후일 복의 터전이 될 것이다. 만약 그리하지 않는다면 비록 서당이 높고 비가 우뚝하게 서 있다 하여도 그 옛 사적을 기록한데 불과한 것이요 말류허문의 따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 어찌 실지가 있다 하겠는가. 이 모든 군자들의 척연히 서로 힘쓸 것이요 한갓 서당을 새롭게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내 특별히 사문의 흥하고 폐하며 세도의 성하고 쇠하는 기미가 실지에 있는 바를 느끼어 감히 이와 같이 써서 학림서원의 기문을 하노라.
세재을사(1965년) 계동 삼괴당 방예 용현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