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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유현(19명)
성팽년(成彭年)
선생의 관향은 창녕으로 자는 이옹이요 호는 석곡이다. 입향조 병마사 윤동의 손으로 서기1540년에 수승대 인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성품이 엄하고 굳세었다 한다. 일찍이 갈천 임훈선생에게 글을 배웠고 24세 되던 서기1564년에 사마양시하였고,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서울 성균관에서 태학을 할 때 고향의 연세 많은 부모 걱정 때문에 공부를 그만두고 돌아올 정도로 효심이 극진하였다. 선생이 53세 되는 서기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의병을 거느리고 송암 김면 휘하에서 국가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때 분함을 통곡으로 아군인 의병을 감동시켜 격전에 임하였다 한다. 조상 제사 때에는 살아 있는 듯이 여겼고 후진 교도에도 꾸짖기 전에 스스로 깨닫도록 타일렀다. 언제나 수승대 척수암 위에서 자연을 노래하며 유유자적한 생활로 일관하였다. 선생의 수승대 시운 첫 머리에 삼라만상을 꽃으로 장식 하였으니 봄은 찾아 왔는데… 라 하였고 척수대 운에서 백옥 같은 물굽이 대를 감돌고…나 홀로 반석에 올라 시산수 읊조리니 만 가지 속세 시름 속절없이 씻어지네. 라고 하였으며, 이밖에도 학담과 만천의 경을 찬미하며 노래하였다. 문간공 동계 정온은 선생의 문인으로 귀양살이 중이던 서기1618년 무오춘삼월초일일에 석곡선생 전기를 썼다. 전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선생은 문장이 뛰어나났는데 그 중에서도 고문에 능하였다. 성품은 엄격하고 행의는 준결하며 용모는 학과 같이 깨끗하였고 시속의 하찮은 말은 입에 담지 않았으며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자랑하지도 않았다. 또한 후에 동계가 이르기를 오늘날을 얻은 것은 대개 석곡선생의 힘이 많았다고 술회하였다 한다. 선생은 상체찰사서에서 임진왜란 때 영남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근왕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청참김수조대곤소에서는 벼슬아치로서 임무를 소홀히 한 절도사와 감사를 엄히 다스릴 것을 주청하였다. 난후에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사후 지평에 증직되었다. 서기1594년에 세상을 떠나니 사림들이 구연사에 향사하였고 구연서원 뜰에 선생을 기리는 유적비가 서있다. 임란 순절신 영남충의단에 위패가 봉안 되여 매 춘추향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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