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학생 경주이공 택영지려
자식의 도리를 다한 효자 이택영의 정려이다.
위천면 모동리 45번지 원당리 새터마을 어귀의 도로가에 있는데 효자의 증손 상우와 형우가 1938년에 세웠다. 정려 안에 오석으로 만든 비가 있어 표면에 효자 학생 경주 이공 택영 지려라 음각하였고 측면과 후면에 기문이 작은 글자로 음각되어 있다.


역문
효자 경주이공 정려
우리나라가 유학을 숭상해 온 오백년 동안 위로는 인륜이 밝고 아래로는 교화가 실천되어 벌열과 오두가 끊임없이 서로 이어졌으니 아름답고도 훌륭하도다. 이는 성상께서 좋은 풍습을 심고 선을 권면한 덕택이었다. 자식이 효도하는 인륜의 중요성을 시전에서 이르지 않았는가?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그 은혜 갚고자 하나 하늘처럼 끝이 없네 하였으니 자식 된 도리로 누가 자기 부모를 잘 섬기고 싶지 않으리오마는 세상의 도덕이 떨어지고 교육이 느슨하여 그 부모를 모실 때도 그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고 병이 나도 그 근심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고 돌아가셔도 그 슬퍼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으니 여기에 자식 된 직분을 다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정려의 은전을 베풀었다. 화림현에 이택영이란 효자가 있어 어려서부터 이미 어버이를 사랑하는 도리를 알았다. 자라서는 부드러운 음식과 아침저녁 문안을 아주 극진히 하였다.
그 어버이가 병이 나자 밤낮으로 약을 드리고 밤잠을 자지 않고 간호한지 여러 달이었으나 점점 더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 끊어지려든 목숨을 다시 소생시켰다가 결국 돌아가시자 슬퍼하여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장례의 모든 절차에 한결같이 예의를 다했으니 이 같은 사람을 정말 그 성품의 간직한 바를 다 한 것이고 직분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효자는 월성부원군 천의 후손으로 이조참판 초려선생 유태의 9세손이다. 세대가 오래되고 미약하여 먼 고을에 흩어져 살고 있으나 선조의 충효 정신을 잘 지켜서 여기 뛰어난 행실이 있는 것이니 영지버섯이나 맛 좋은 샘물이 어찌 뿌리와 근원 없이 저절로 생기겠는가?
사림에서 이 일을 조정에 알려 특별히 정려를 내리셨다. 그 아들 규병이 예조에 올린 글을 내게 보이며 그를 위하여 기문을 지어 주기를 청하므로 간략히 그 사실을 서술 한다. 숭정기원 후 다섯째 을미년(고31, 1895) 4월 하한에
통정대부 행 안의 현감 조원식 삼가 지음 성을 얻은 후 1908년 무인(1938) 10월 24일 증손 상우 형우
사인 헌진의 여이며 거창인 유유순의 처이다. 나이 17세에 출가하여 3달 만에 부군께서 별세함에 하종코자 하였으나 시부모의 봉양과 가사를 이어받아 효성이 지극함에 향리에서 효부라 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