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리 769번지 구연서원 담장 안에 있는 야천 신복진의 유적을 기리는 비다. 1966년에 세웠다.
야천 신복진은 효자로서 우애가 남달랐으며 학문이 장하였다.

역문
야천 신선생 유적비
안음의 원학동에 수승대가 있어 영남의 명승지이니 곧 요수 신선생이 쉬고 노닐다가 장수한 곳이다. 대의 곁에 요수정이 있고 그 동쪽 백여 보 거리인 야담쏘 밑에 야천정사가 있으니 요수선생의 아들 휘 복진이 거처하면서 그곳에서 학문을 닦았으므로 야천정사라 하니라. 선생이 몰함에 이르러서 사람들이 화천사에 향사 하였는데 사는 구연서원과 가까운 곳이다. 이제 터만 있고 사우 없어짐이 이미 오래로다. 원근 사림들의 사모함이 아직도 적지 아니하니 감탄스럽도다. 하늘이 이미 산수의 영구를 열어서 또다시 현인군자를 그 사이에 강림시켜 그곳을 장악 관리하며 장식하게 함이니 아버지가 아들의 가풍일신을 도움이 서로 정자 사원을 이어서 빛냄은 샘과 반석이 중요함을 더하여 서로 바라보니 어찌 아니 좋을쏜가. 선생이 타고난 성품이 이미 아름다워 가통의 근본이 학문과 현실로 심신에 다짐하여 소극성을 싫어하고 몸소 실행함을 근본 삼았다. 일찍 어버이의 명으로써 공거업(벼슬길)에 나가서 여러 차례 향시를 치렀으나 오직 어버이 섬김과 형제간의 우애 등 인륜을 중시하였다. 그 상기에는 슬픔에 몸이 상했고 시묘 살이로 복제 마칠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피눈물을 흘리니 세인들이 감복하지 않을 수 없더라. 그때 조정에서 사부들이 여묘를 불살으라고 명하여 감시관 정굉이 선생 여막에 이르러 보고 도리어 절하고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죄인이 될지언정 어찌 참아 효자의 여막을 불사르리오. 추원 돈독하여 일찍 말하기를 기일은 몸 다하도록 복 입을 것이지 어찌 가히 지자로서 경솔 할 것인가. 백중형 섬기기를 엄한 아버지와 같이하여 아침저녁 문안드리기를 늙어도 마지않으니 이가 곧 그의 행의의 돈독함이라. 부옹이 무자하여 선생의 다음 아들로서 봉사하고자 함에 선생이 불가함을 극단하고 그의 일가들과 의논하여 뒤를 세우게 하니 곧 그 예를 밟음이라. 부옹의 현인 이청연 후백이 벼슬을 추천코자 하니 선생이 사양해 말하기를 내 몸 들추어서 녹 먹음은 선비의 수치이라 국가에서 백성으로 하여금 납세 요구는 할 수 있겠으나 어찌 벼슬을 함부로 줄 것인가 라고 하였다 하니 선생의 결백한 성품을 알 수 있느니라. 선생의 지조와 선견지명은 특이했고 항상 의를 숭상하며 영화를 외면하고 임천에 묻혀 수신하고 학문하니 외숙 임첨모당이 양자증을 비유하며 수승대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고, 동계 정문간공이 제주에서 선생의 부음을 듣고 시를 지어 가로되 요수정과 학의 꿈이 시들었으니 신선의 구역이 어디 뫼인데 홀로 방황 하는가 효도와 우애는 인륜으로 덕의 연원에 틀림없으리라. 당당한 말씀은 만인에 공명하고 강직한 위풍에는 만인이 놀라더라 늙은 선비 말 들으면 밤이 길다 한데 내 고향은 장차 어떻게 되리. 도암 문정공이 그 묘비에 명하기를 넓은 학문과 돈독한 의지와 분수 맞는 수신은 그의 천성이 온전함에 있었다 하였으니 가히 선생을 알 수 있음이라. 선생의 후손들이 유적비를 세우려고 종숙 주성 해성 도성 등으로 하여금 행장을 안고와 나에게 글을 구하거늘 사양하다가 떼지 못하여 차례로 그 사적을 펴면서 이어 가로되 학담의 물과 금원산의 청숙한 기운이여 그간에 한 가성이 빛났으니 좋은 아버지에 올바른 아들 시례 가훈에 인과 지로 도움되어 그 즐거움을 어찌 구연의 물로 다하랴. 야천의 청백함이 맑은 물 같이 흘러도 마르지 아니하고 가히 못이 넘쳐 가리로다. 그 근원 얻어 풍월로 술잔 나눔을 어찌 잊어리오. 병오 모춘에 화산 권용현은 찬하고 족 방손 원성이 삼가 쓰다. 단기4299년 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