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천면 상천리 172번지 서원마을 입구에 있다. 처사 경재래의 행적을 기리는 비다.
서기 1910년에 비를 건립하였다.

역문
경처사 유적비
공의 휘는 재래이며 자는 내징이요 호는 원계로서 청주 사람이다. 문하시중 정렬공 청의당 휘 복흥은 공의 13세조가 되며 청백리 순절공 휘 의는 곧 공의 12대조이다. 호조판서 호 호암공 휘 지는 곧 공의 10대조이며 진사 휘 사창은 즉 공의 7대조이다. 그 세덕과 선열은 우리 동쪽의 명문 망족으로서 아무 부끄러움이 없으나 상상공이 남쪽으로 떨어져 내려온 후부터 집안의 이름이 점점 바뀌어졌으니 이 어찌 아는 사람으로서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공은 나서부터 남달리 똑똑하고 효도와 우애가 출천하였다. 품안에서 떠난 후부터 능히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아서 아름다운 과실과 별다른 맛이 있는 것을 얻은즉 반드시 품어서 갔다 드리었다. 그 후 커서는 맛있는 음식을 몸소 어버이를 위하여 봉양하였으며 부모가 질병이 있을 때에는 근심 걱정으로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었으므로 이웃과 시골에서 다 이상하게 생각하였고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글을 배우기 시작할 적에는 책을 지고 가서 황고 신선생 휘 수의의 문하에서 배웠다. 먼저 『사람 된 근본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효도와 우애 일뿐이니라』하니 공은 유유히 물러나와 이로부터 정성과 효도를 더욱 돈돈히 하고 봉양을 모나지 않게 하였다. 아침저녁 문안과 봉양하는 여가에는 경서의 뜻을 읽고 궁리하여 깊이 성리에 잠기니 선생은 특히 허서와 진남당에게 더 배울 것을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새벽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경계를 받아서 힘썼으니 가히 볼만하였다. 스승과 벗이 서로 얻고 서로 의지하며 공을 더욱 중하게 여겼음이 어떠하였겠는가? 공의 나이 19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그 가슴치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모양은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초종범절은 한결같이 옛 예를 지켰으며 혹 예에 의심이 있으면 반드시 선생에게 질문하여 행하였다. 죽을 먹으며 3년 동안 몸에서 띠를 풀지 않고 한발도 여막에서 나가지 않으니 그때의 사람들이 모두 거상 잘하였다고 칭찬하였다.
모부인이 집에 계실 때에는 공은 정성을 다하고 효도를 다하여 일찍이 좋지 않은 말이나 급한 빛을 어버이 옆에서 보인일이 없었으며 부드럽고 연한 음식을 입에 맞게 드리고 춥고 더운 철에는 그 몸을 편안하게 하여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였다. 병환이 심하였을 적에는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효도하였으며 내가 대신 가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돌아간 뒤에는 한결같이 먼저 상례 때와 같이 하였으며 장례를 예로써 하고 슬퍼하여 뼈가 앙상하게 섯으며 채소와 과실 등을 입에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공자가 말씀한 『살아서는 예로써 섬기고 죽어서도 예로써 장사 지낸다』라는 것은 공을 두고 한 말인가?
공은 선생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였다. 어려서 이를 갈 나이 때부터 늙어서 머리가 흴 때까지 지팡이와 자리 옆에서 돌면서 정성과 공경함이 덜하지 않았고 묻고 대답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함께 즐겁게 지냈으니 공자가 이른바 『낳은 데는 세 곳이나 섬기는 것은 한결같다』라는 말은 공을 두고 이른 말이로다. 같은 문하의 여러 선비들이 많이 그 도를 얻었으나 스승에게 배운 대로 올바르게 전한 것은 또한 공에게서 볼만한 것인즉 그의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과 효도가 비록 하늘이 내려 주신 성품이라 하더라도 역시 이 어찌 스승을 따라서 보고 느낀 까닭이 아니겠는가?
공은 일찍이 소학을 읽으며 말하기를
『사람되는 방편이 다 여기에 있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뛰어 넘어서 먼데서 구하겠는가? 자제를 가르침에는 반드시 효도와 우애로써 먼저하고 안방에서 안으로 감화되어 온 종족이 화목하고 서로 믿고 돈독하게 펴 나아갈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공은 재주와 기량이 넉넉하고 학문이 깊고 깊어서 온 세상 무리들이 소중하게 멀지 않는 이가 없고 분수를 지키고 덕을 기르며 마침내 숲과 샘 속에서 늙어서 몸을 마치었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아! 아깝도다. 승지 신성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