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의 변란과 사화가 잠시 멈춰지니 16세기는 이 땅에 현인석사가 수없이 나왔고 또한 이들은 이에 탄탄한 선비의 고장을 만들어 놓았다.
권시민(權時敏)이 입향한 후 임훈(林薰) 신권(愼權) 남매와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인 조숙(曺淑)등이 여러 동료들과 더불어 원학동에서 교학에 힘썼고 임운(林芸) 정유명(鄭惟明) 성팽년(成彭年)같은 선비들이 거의 동시에 배출하였으며 조학(趙謔) 강위용(姜渭龍)등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향토정신의 근원을 다졌으니 오늘에도 그의 후예들이 더 더욱 이 고장을 빛내고 있다.
1. 요수 신권(樂水愼權)
거창신씨의 입향조 우맹(友孟)의 아들로 서기1501년인 연산7년에 출생하였다. 벼슬은 선교랑훈도를 지냈고 서기1542년인 중종37년 수승대(搜勝臺) 옆에 재사를 지어 당시의 명류와 창화도요(唱和道遙)하고 천석경승(泉石景勝)을 즐기다가 여년을 마치니 서기1573년인 선조6년 12월 23일이다. 평생을 한결 같이 지냈고 효성과 학덕이 뛰어나 후학들이 요수선생이라 칭하고 재사를 요수정이라 하였으며 학행과 덕의가 있어 서기1694년인 숙종20년에 구연서원(龜淵書院)에 향사하였다. 원정에 요수 신 선생 구연동 수승대 유허 산고수장비(樂水愼先生龜淵洞搜勝臺遺墟山高水長碑)가 그의 유적을 기리고 있다. 요수선생은 구연서당을 창건하여 많은 제자들을 교육시켰으며 요수정과 함양재를 창건하고 노시였다. (요수실기 참조)
2. 죽헌 조숙(竹軒曺淑)
창녕인으로 목민관이며 문인이자 도덕군자이다. 서기1504년인 연산10년 3월7일에 황산마을에서 태어났으니 현신교위(승로)의 아들이요 입향조 판서 중인의 증손이다. 어릴 때 석천(임득번) 문에서 수학하였고 뒤에 하서 김인후(金麟厚) 문에 출입하였다. 서기1531년인 중종26년에 사마양시(司馬兩試)하고 1540년인 중종35년 문과에 등과하여 홍문관교리 사헌부지평을 거쳐 사간원 사간에 이르렀을 때 권신의 간계에 불응하자 그의 모략으로 광양(光陽)에 출보했다가 1553년 명종8년에 호조정랑과 사복첨정이 되고 흥양(興陽) 낙안(樂安) 영암(靈岩) 광주(光州)등으로 출수하였으며 서기1568년 선조가 등극하자 이조좌랑이 되었고 홍문관전한 풍기군수(豊基郡守)를 역임하다가 서기1573년에 이조정랑으로 행 회양부사 하였다. 만년)에 걸 귀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임천에 묻혔다. 황산 뒤 정안동(靜安洞) 서당 터에 낙성재(樂聖齎)를 지어 놓고 성리학을 탐구하다가 서기1582년3월27일에 서거하여 황산 정안동에 안장되었다.
죽헌문집 4권이 있으며 특히 선조계유년의 경회루 애련시(慶會褸愛蓮詩)는 그의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유허지인 정안동에 선생의 사적비가 있고 학림서원에 향사한다.
3. 수오재 조학(守吾齋趙謔)
서기1488년8월24일 한양재동(漢陽齋洞)에서 태어나 1548년1월19일에 원학동 고산(현 위천면 장기리 오무봉) 밑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위천면 전역에 살고 있는 한양 조씨의 입향조이다. 어려서 삼종숙인 문정공 정암(靜庵)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함양군수를 지낸 그의 선인 조영손(趙永孫)을 따라 서울서 남으로 왔다가 만년에 산자수명한 이곳에 정착하였다. 평생을 자연과 학문을 즐기며 살았고 특히 태극과 성리학의 원리 터득에 심혈을 기우렸으며 효제와 충신지도를 실천 하였다.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사림들의 천거로 조정에서 이조정랑을 증직하였고 정충사에 향사하였다.
4. 역양 정유명(嶧陽鄭惟明)
초계 정씨 입향조 생원 제안(齊安)의 현손이요 확계 옥견(玉堅)의 손이며 문간공 동계 정온(桐溪鄭蘊)의 선대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했으며 일찍이 진사에 급제 하였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극진 하였다. 임갈천(林葛川)에게 수업하였으며 노옥계(盧玉溪)에게도 배웠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향인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고 의병장 김면(金沔)이 거창으로 옮겨 옴에 그 막료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서기1539년인 중종기해에 역골서 출생하여 1596년인 선조병신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고 역천사(嶧川祠)에 제향 되었다. 지금도 역동 그의 묘소 앞에 신도비가 충효의 얼을 기리고 있다.
5. 석곡 성팽년(石谷成彭年)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이옹(㶊翁)이다. 입향조 병마사 성윤동(成允仝)의 손으로 서기1540년에 황산에서 태어났다. 156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으로 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와서 학문연구에 전념 하던 중 임진란을 당하였다. 그는 동문친우 정유명(鄭惟明)과 더불어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하였고 의병장 김면(金沔)의 막료가 되어 여러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조정에서 동몽교관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아니하였다. 특히 시문에 능하여 수승대(搜勝臺) 안의 광풍루(光風褸) 등 여러 곳에 많은 시운을 남겼다. 사후 지평으로 증직 되었고 황산 구연서원(龜淵書院)에서 향사하며 서원 뜰에 그를 기리는 유적비가 있다. 묘소는 기백산(箕白山) 아래 한수리(漢水里)에 있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병환에 변을 치우는데 누이가 개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직접 달려가 누이를 꾸짖고 손수 변을 치우기도 하였다.
6. 박약재 강위용(博約齋姜渭龍)
진양인으로 자는 문망(文望)이며 호가 박약재(博約齋)이다. 그는 전라도 나주에서 출생하여 함양에서 자랐고 개암 강익(姜翼)의 질이다. 처향인 이곳 서마리로 와서 살았다. 명문출신으로 서기1558년인 명종무오에 성균 진사가 되었고 학문이 깊었으며 도덕이 장하였으나 불과 40세의 나이로 1575년에 세상을 떠났다. 학림서원(鶴林書院)에 향사하고 사마 마을 불고대(不孤臺)앞에 그를 기리는 유허비가 있고 묘소는 수교동(水橋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