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리 768번지 수승대 국민관광지 경내 청송당 담장 안에 있다. 1966년 구연서원 경내에 세웠던 것을 1987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청송당 신복행의 행적을 기리는 비다. 청송당 신복행은 효행이 지극하였고, 우애가 남달랐으며 학문이 장하였다.
역문 청송 신선생 기적비 옛날에 한문공이 동생원의 행장을 지을 때 먼저 회수와 동백산을 칭한 것은 그 산수가 현인군자와의 관련이 있음이니라. 아음의 원학동 수승대는 낙동강 상류의 큰 명승지이다. 신씨 선조가 영암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사현을 배출하였으니 우연한 일이 아니리라. 산수 암대의 기운과 정기를 받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선생의 성은 신씨이요 휘는 복행이며 자가 성지이고 관향이 거창이다. 고려 좌복야 공헌공 휘수가 그의 시조이며 대대로 벼슬을 하였음은 국사에 소상하다. 육세조 휘가 이충으로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아림부원군 양열공이고 조부의 휘가 우맹이며 승훈랑으로 이곳 안의에 처음 들어오셨다. 아버지의 휘가 권이니 곧 요수선생이라 대의 서편에 정자를 지어 요수정이라 하고 장수지소로 삼았다. 어머니는 덕은임씨이니 진사 득번의 따님이다. 1533년에 선생이 황산에서 출생하여 성품이 청수하고 기량이 넓었으며 일찍이 학업에 힘써 몸가짐의 법도를 소학으로 삼았다. 어버이 섬기는 효성이 극에 달했으니 부친상에 이르러 흐느끼며 죽 먹기 3년을 하였고 어머니상을 맞아서도 전과 다름없었다. 항상 동기간에 화합하였고 학문에 힘써 경사를 달통하고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대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그의 아우 야천공이 늘 중씨의 학문을 추앙하였다. 하니 선생의 학덕을 후학으로서 어찌 말로 평하랴. 항상 아들과 조카들에게 당부하기를 부질없는 자랑과 헛된 재조는 사람들의 뜻을 그르치기 쉬우니 너희들은 삼가라 하였다. 문장과 덕망이 당대의 근본으로 향리에서 자랑하니 옥계 노 문호공이 고을 현감으로 와서 조정에 천거하여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평생토록 자장의 녹에는 뜻이 없고 안연의 누항에 처함을 달게 여겨 도연명의 소나무를 사랑하는 취미를 초월하였다. 중년에 위수의 북녘(현용수막) 덤불산 밑에 작은 재실을 짓고 뜰에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가로되 청송당이라 하였으며 자신의 호로 하였다. 자신이 사운이수를 지었으니 그 뜻이 가상하여 동계 정 문간공이 시한수를 써 가로되 빈한한 모습도 즐거워하는 늙은이에 나이가 더해가니 깨끗한 집에서 맑은 나날이 더해가네. 일평생 정직만이 생각에 감겼고 반평생 할미처럼 앉아 읊조렸다. 새는 밤에 취중에서 잠깨어보니 별과달이 자리를 옮겼고 섬세한 창가에서 잠깨어 보니 차가움이 옷깃에 스며드네. 학과 곳집 인연이 아니로되 선생 집 가운데 앉았으니 솔숲이라 하여도 어느 곳에 이 읊조림 있으랴. 이 시를 보면 선생의 정직한 성품과 티 하나 없는 욱욱청청 군자절의 솔 그리고 곳집속의 학으로 비유하였으니 흔히 나는 인물이 아니리라. 그 재주 특출하였고 그 뜻은 항상 탁함을 물리치고 맑음을 택하였다. 명산을 밟으며 넉넉히 노닐면서 읊조렸지만은 뜻하던바 어찌 다했으랴. 만력 갑자에 수직으로 통정 벼슬을 받고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니 정조계묘년이다 향중 선비들이 정충사에 모셨으니 봉안문에 호문부자 정가제형의 여덟 글자는 백세토록 새길 어구이다. 후손 종의가 경양산방까지 나를 찾아와 선생의 행장을 내어 놓으면서 선조의 행의는 진실 그대로 후대에 전수토록 해야 하는데 세월이 갈수록 누락이 걱정되니 비로소 실상을 기록하기로 의논이 되었다 하며 나에게 글을 요청하므로 내 비록 능하지 못하나 거절 할 수 없어 그 행장문을 안찰하여 기술하였다. 단기4299년 병오3월 일 하동 정도현이 찬하고 해주 정원진이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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