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천면 황산리 769번지 구연서원 원정에 있다. 문충을 겸전한 석곡 성선생을 기리는 비로 1996년에 건립하였다.
석곡 성선생은 서기1540년에 황산에서 태어나 나이 25세에 사마양시하고 임진란을 당하여서는 의병을 일으켜 종군하였으며 많은 글을 남겨 향을 빛낸 명현이다.
서기 1694년에 사림들이 구연서원을 세워 향사하였다.

역문
석곡 성선생 유적비명 병서
나라에 태학을 두고 고을에 서원을 둠은 고제이다. 태학은 국사의 강습소로 반드시 부자묘를 설립하여 향사드리고 서원은 향사의 장수소로 반드시 향선생사를 두어 숭배하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학자가 수업함에 성현의 심법과 학문을 법 삼아 길이 표준삼으니 체득하기 위해서다. 현재는 그렇지 못하여 이미 그 본지를 잃고 단지 향례만 행하니 우리 도가 날로 쇠함을 이에서 더욱 느끼게 된다. 안의의 황산에 석곡 성선생이 태어나 고학과 탁행으로 명종선조 대에 진작하여 남방에 교화를 베풀고 풍속을 광정하다가 몰세하니 이제 사백년이다. 남주의 사림이 항상 추모하여 오던 중 숙종갑술년에 구연서원을 안의의 수승대에 창건하고 선생과 신요수 선생을 병향 하였으며 순조정묘에는 신황고선생을 추향하여 이제에 이르도록 변함없이 향화를 드리니 어찌 본향백세의 사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선생세대가 연심하여 아득하고 세란도쇠하여 그 미적이 따라서 또한 불현하니 자손이 이를 개탄하여 광복 갑술추에 주사로 더불어 장차 유적비를 마련코자 선생주손낙위가 그 일족 두영 동영 낙민과 함께 멀리 진주로 달려와 비명을 인찬에게 구하므로 인찬이 생각하니 이번 역에 천루하고 무식한 것이 어찌 감히 선생의 성덕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마는 다행히 동계 정문간공이 엮은 선생전을 얻어 읽고 또한 제공이 찬술한 행장과 묘갈을 상고한 끝에 대략선생의 풍교를 짐작하고 문득 참월함을 잊은 채 삼가 서하여 이르기를 선새의 휘는 팽년이요 자는 이옹이니 창녕인이다. 고려 중윤호장 휘 인보가 그 상조이고 뒤에 대대로 공경과 석덕이 사서에 불절하며 증조 휘이건은 호가 백촌이요 관은 부사니 한성에서 함양의 백전으로 옮아왔으며 조휘 윤동은 호가 척암이요 관은 병마절도사로 안의 황산으로 우거하였다. 고 휘한량은 음사로 충순위병절교위이고 비의인 팔계정씨는 참봉형의 여이다. 중종35년 경자에 선생이 황산재에서 태어나니 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가졌고 기국이 준수하며 기상이 활달하고 총명이 과인하여 한번 보면 문득 기억하였으며 성장함에 미쳐 군서를 박람하고 묘리를 탐구함은 물론 그 외에도 의약 복서 천경 지리에 통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25세에는 사마양시에 급제하니 명성이 일방에 진동하였으며 그 태학궁에 유학하여서는 로우 중에서 앞서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선생이 고전을 힘써 배우고 진언 버리는데 열중하여 시문을 답습하지 아니하므로 과거에 불리하였으니 사우들이 이르기를 피리를 좋아하는 제왕의 문에서 비파를 잘 타는 선비가 구사하지 못한 고사에 비유하였다. 임갈천 선생에게 친히 수업하여 몸을 닦고 덕을 훈도하여 학문하는 요결을 많이 받았다. 선생은 일찍이 불원유 3자로 좌우명을 삼았으니 태학에 유학한지 1년 만에 돌아온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때부터 과거를 폐하고 오로지 천인의 오묘한 리를 찾고 연구하여 부지런히 일용의 떳떳한 도를 행하였으므로 학문은 더욱 깊고 덕은 더욱 높아져 그 공업이 날로 성취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 모부인이 병으로 6년을 앓게 되자 선생은 안색에 시름이 가득 차 한 발자국도 옆을 떠나지 않았고 약과 미음으로 병을 완치토록 하는 일과 변기와 오물의 세탁에 정성이 지극하였으며 몸소 기도문을 지어 대신하기를 원하였고 근심이 맺혀 침식을 잃게 되니 지성이 신명에 달하여 드디어 모부인이 소생하였다. 30에 외우를 당하고 50에 내간을 만나서는 비통함이 제례를 지나쳤으니 그 송종엔 정문이 갖추어졌고 친제에 성경을 겸전하였으며 평생 동안 자직을 완수하여 하나도 여한이 없었으니 대개 하늘이 내린 효자이다. 복을 마친 익년임진년에 왜구가 창궐하여 대가는 서도로 피난하고 생민은 모두 어육이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선생은 발분하여 투필하고 향병을 모집하여 토적함에 먼저 김송암면의 막중으로 달려 제장으로 더불어 숙야로 전략을 꾀하여 참획한바 많았으며 또한 둔적으로 하여금 재를 넘지 못하게 하였으니 당시의 진양일로가 완전한 것은 실로 선생의 공이다. 이어서 왜적이 재성하여 문적이 탕진되고 마침내 선생의 우국단충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였으니 이 일이 매우 슬픈 일이다. 뒤에 법에 따라 의병이 관군에 속하게 되자 검을 풀고 돌아와 별안간에 병을 얻어 선조27년 갑오에 졸하니 향년이 55세이다. 묘는 고현대치동경자원이고 배숙부인성산이씨를 부하였다. 5자녀를 두니 4남은 진규 후규 변규요 효규는 진사며 1여는 류종기의 처요 손남 길창 경창 우창 도창은 백방출이요 중방은 무육하여 경창으로 사하였으며 지성은 숙방손이고 이창 계창은 계방손이며 여는 불록한다. 선생은 처음에 동몽교관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뒤에 사헌부지평을 증직 받았다. 아아! 선생은 루대로 혁혁한 문중에서 생장하였으며 어려서 의표가 후중하여 바라봄에 간송 같아 자연히 범할 수 없는 기상을 가졌고 이미 발탁한 재주로 3고의 역에 흠뻑 적셔져 조생에 인자한 뜻을 품었고 만년엔 계개의 마음을 가졌으며 또한 타고난 성품이 엄하고 굳세어 굴하지 않았고 제행이 준결하여 법도가 있었으며 몸이 크고 골격이 빼어났고 신채가 늠름하여 란혹이 머문 상과 같았으니 이는 선생의 천품이 풍부한 바요 부모를 섬김에 지체의 봉양을 다하였고 자매와 우애있어 간언이 담안에 불입하였으며 문 닫고 단정하게 거하여 역사를 연구하고 정미한 이치를 분석하며 그 묘미를 앂어 통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락으로 근심 잃어 다가오는 노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는 선생이 함양함에 독실함이요 평소에 더러운 말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천오한 행동을 몸에 접하지 않았고 처사하고 접인함에 조금도 교만하거나 자현하지 않았으며 혹 취향이 비록 다르다 하여도 일찍이 모가 나지 않았고 사람과 대담함에 그 과실을 말하지 않아 초연히 정을 물외에 붙였으며 시에 더욱 능하여 매양 승경을 만나면 위천 내에 갓끈 씻으며 시 읊어 즐기니 그 격조가 웅장하고 청고하였으며 문장 또한 왕양하여 끝이 없어 조금도 고생한 태가 없었으니 고인이 이른바 흉중에 넓힌바를 그 외부에 베푼 것이다. 필법도 또한 굳세어 왕의지의 신법을 얻었으니 이는 선생학행의 탁절함이요 선생의 본성은 록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동년인 서애유문충공은 선생이 세상에 쓰이지 못함을 염려하여 여러번 글을 보내 벼슬을 권했으나 선생은 태연히 장차 몸을 더럽힐 것 샅이 여겼다. 명종년간에 요승보우가 문정후의 사람을 독점하여 혹세무민을 감행하였으나 다 두려워 감히 주청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동지수인과 함께 어려움을 무릅쓰고 적승의 참수를 상소하여 상하가 모두 쾌하게 여겼으니 이는 선생지절의 름연함이다. 선생의 학문과 뜻이 이같은 고로 문간공이 간기인물이라 칭송하였고 한강정문목공이 만사에서 그 공덕을 들추었으며 여헌 장문강공이 행장후발을 찬하면서 은군자로 극칭하였고 또한 거창안의의 사자들이 정성껏 위호하여 산두같이 앙모하고 시구같이 믿어서 해마다 향사받들어 잊지 아니하니 이로써 선생의 혼령은 천년토록 편안하여 빛을 드리움이 분명하다. 그 후도된이 누가 흠모하지 않겠는가. 명하여 이르기를
예부터 안음은 남방의 추노로 거유가 면련하여 천하에 명동했네. 아아! 선생은 기운 길러 낳은 바라 학문은 고금에 엄박하고 행실은 신명이 아는 바라 타락한 신채는 청수의 소용같고 아름다운 덕 쌓아 옥같이 예쁜 얼굴 태학에 유학함에 영문이 넘쳤고 임천에 은거함에 문과 질 빛났네. 의로서 대가사귀어 정답게 공 쌓았고 후인을 계개하여 탑 베풀고 강도했네. 왜적토벌충성은 일편단심 그것이고 장막 속 계책은 상하가 다 믿었네. 뜻을 청수에 숭상하여 홀로 청풍 즐겼고 어찌하여 구사하랴 군자로 생 마쳤네. 길이 군자 맹세하여 도학에 공 실어 살아선 명현이요 몰하여는 묘식하네. 이에 큰비 세워 벽공에 흘립하니 명사를 높이 걸어 그 실공 유양하네. 후도는 첨앙하고 나그네 모범삼아 저 청파로 더불어 천만년 장수하리. 서기1992년 삭녕최인찬근찬 후학방후손 규만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