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병의 창의
임진년 4월말에서 5월 사이에 영남일대에는 많은 의병이 일어났으니 곽재우는 의령에서 정인홍은 합천에서 고령에서는 김면 등이 낙동강 서안을 버티고 있었고 7월에는 삼가에서 박사제 등이 민족 항쟁의 선두에 나섰다.
특히 송암 김면(金沔)은 지리적 요지인 거창에 와서 5월 22일 가북 용산으로 동문인 문위(文緯)를 찾아 변혼(卞渾)과 윤경남(尹景男) 등으로 창의하였다. 그들은 지략이 겸전한 김면(金沔)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각 고을의 기병 유사와 참모유사 등을 정했는데 거창 기병유사에 문위(文緯) 류중용(柳仲龍) 안음에 정유명(鄭惟明) 성팽년(成彭年) 함양에 노사상(盧士尙) 박선(朴選) 산음에 오장(吳長) 임응빙(林應聘)을 임명하고 박성(朴星)을 운량차사원으로 참모에는 이승(李承)과 윤경남(尹景男)을 거창 출신인 신수(愼守) 안의현감 곽준(郭䞭) 변희황(卞希璜) 양면(梁緬)을 군기유사 군량유사 전마유사로 각각 임명하였고 이미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있었던 변혼(卞渾)은 김면(金沔) 막하의 선봉장이 되어 지금의 웅양면 우두령 밑 우지곡에 진을 치고 지례(智禮) 김산(金山) 개령(開寧)등지의 고바야가와 다까가게의 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안음의 기병유사 정유명은 54세의 나이로 나라에 충성을 맹서하고 향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창의하여 의병장 김면 막하로 들어가 왜적을 무찌르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동계선생 문집 권지삼 행장 난에 보면 선생은 자기 아버지의 행장을 찬술하고 있다. 거기에 의하면 공의 이름은 유명(惟明) 성은 정씨 본관은 초계이다. 스스로 호를 역양(嶧陽)이라 했다. 공은 중종34년(1539)3월4일 태어났는데 선조30년12월9일 5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공은 1573년(선조7년)에 진사에 급제했는데 소년시절부터 갈천 임선생에게 학문을 배웠다. 학문과 뜻을 같이한 사람으로는 석곡 성팽년 등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거창 의병장 김면을 도와서 의병을 모집하여 향토방위에 신명을 바쳤다. 이때 공과 같이 창의한 사람으로는 문위 성팽년 윤경남 유중룡 변혼 정용 변희황 신수 전팔고 형효갑 김신옥 양면 장응린 등 이었다.
임진년 8월초에 초유사 김성일이 경상좌도로 전출된 것이 거창 의병본부에 알려졌다. 이에 거창 합천 산청 단성 삼가 의령 진주 등지의 선비들이 모여서 열읍에 통문을 내고 초유사의 전출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중심인물이 정유명 이었고 선조왕에게 상소하는데도 공이 소두가 되었다. 열읍에 보낸 통문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우리 영남은 왜적 침입 이래 열성이 와해되고 벼슬아치(현감 군주 등)은 도망치고 백성은 왜적에게 살육되는 환경에서 우리 초유사 김상공(金相公)은 민심을 안정시키고 창의를 격려하여 군신지분을 밝히고 복수의 의를 고창하였는데 그 언사가 간절하여 이를 듣는 자로 하여금 감분케 하여 눈물을 감출 수 없게 되어 폐허 속에서도 의병이 창궐하여 이제 겨우 향토의 안정을 가져왔는데 돌연히 좌도로 전출됨은 조정에서 우리를 버림이요 이때까지 목숨을 바쳐 이룩한 공을 일시에 없이 함입니다”고 간청하였다.
이 상소문은 박간(朴幹)이 지었고 함양 향교 각재에 모여 정유명을 소두로 삼고 성팽년(成彭年) 노사상(盧士尙)을 장의로 하고 노주(盧冑) 강린(姜麟)을 유사로 제소는 박여량(朴汝樑) 사소(寫疏)는 박여량과 정경운(鄭慶雲: 고대일기저자)등이 맡아 진행했는데 조정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초유사 김성일의 경상좌도로의 전출이 취소되었다.
공은 이상 외에도 경상감사 김수와 경상병사 조대곤이 왜적의 침입을 방관하고 오히려 겁을 먹고 도망만 치고 다니기에 이들의 처벌(목을 베어서 기강을 확립 하라는 뜻)을 주장하는 상소 등에도 동참하여 선비정신을 몸소 실천하여 후세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또한 성팽년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 와서 학문연구에 전념하던 중 왜란을 당하자 정유명과 더불어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하였고 송암 김면의 막료가 되어 전공을 세워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대 비분함을 통곡하여 아군인 의병들을 감동시켜 격전에 임하였다.
공의 문집 중 행장에 의하면 성은 성씨(成氏) 이름은 팽년(彭年) 호는 석곡(石谷)이다. 함양에서 살다가 조(祖)때 안음(거창 위천)으로 이거해 왔다. 공은 1540년(중종35년) 1월 17일 위천면 황산에서 태어낫다. 그 후 사마 양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부모 봉양이 걱정되어 귀가하였다. 갈천 임훈 선생에게서 배웠고 정유명 신권등과의 친교가 두터웠고 문인에는 정온 오덕 홍등이 있는데 갈천선생의 연보를 찬술했다. 임진왜란 깨는 의병을 모집하여 거창 의병장 김면을 도왔다. 55세로 서기1595년인 서존28년8월15일에 별세 하였다.
그의 전기로 성석곡전(成石谷傳)이 있는데 이는 공의 제자인 동계선생이 찬술했다. 석곡공과 동계선생은 이웃해서 살았고 더구나 동계선생의 아버지인 역양공과는 친구이며 동문수학(갈천선생) 사이이니 누구보다도 잘 표현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공의 학문은 의약 복자 산경(山經)지지(地誌)등에도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격은 엄격하고 용모는 신장(身長) 골수(骨秀)하고 광채가 있어서 신선을 방불케 하였다.

시는 배율(排律)에 능하였고 더구나 필법이 뛰어나서 왕우군(王右軍)을 닮았다. 정온(동계선생)은 소년시절부터 문하에 출입하면서 가르침을 받으니 광야에서 길을 찾은 것으로 나의 오늘은 오로지 석곡공께서 깨우쳐 주신 은덕이라고 하였다.
또한 공의 임진 창의문(壬辰倡義文)은 초유사 김성일의 격려에 감분하여 안음 등지의 선비들이 의병으로 왜적을 격퇴하자는 내용으로 동참한 선비로는 정유문 정유명 김신옥 박명부 등이었다. 내용을 소개하면 본현(안음)에서는 이미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순찰사와 초유사에게 예속시킨바 있으나 관군은 날이 갈수록 참패만 거듭하니 실로 위급하기 짝이 없다. 이에 우리가 신명을 바침은 본래 원하는 바이다. 라고 하여 거듭 창의 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경상감사 김수와 경상병사 조대곤을 목 베라는 상소문을 썼다.
이 상소문은 임진년 8월에 선조대왕께 올린 것으로 정유명 노사상 노주 강린 박여량 정경운 등이 연명하였다.
조선개국 200년 이래 처음 당하는 참변이다. 이것은 우리의 군력이 약해서도 아니고 성지가 미약해서도 아니다. 감사는 한 도(道)의 주인이고 절도사(節度使: 병사)는 삼군의 장수로서 막중한 책임을 가진 자인데 동래가 함락된 이래 감사는 밀양 양산 초계 합천등지로 피해 다니기만 하였고 병사 조대곤은 김해에 있다가 역시 도망만 치게 되니 여타의 벼슬아치(수령현감)들은 불문가지이다. 때문에 왜적은 가진 살육을 다하고 극도의 참극이 전개됨은 오로지 위 두 사람의 죄이니 이들은 목 베어 그들의 책임을 묻고 기강을 바로 잡을 것이며 창의한 의병군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바랍니다. 라는 요지였다.
공은 체찰사(軆察使)에게 다음과 같은 글도 올렸다.
이때 체찰사는 이원익 이었다. 이원익 체찰사가 호남에 와서 왜적 격퇴에 대한 총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호남의 의병이나 식량을 가지고 영남 특히 서부경남일대를 도와 달라는 요지인 것 같다.
지금 영남에서는 진주의령 성주 거창 함양 등지에서 호남으로 향하려는 왜적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영남은 기진맥진 하고 있다. 영남을 구원해 주지 않으면 호남이 있을 수 없고 호남과 영남이 없는데 조선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의 건의서이다.

영남의 몇 고을의 남은 백성들이 왜적의 어육 됨을 면하지 못할 때 호남의 길은 보전될 수 없다.

또 이때 호남에서는 최경회(崔慶會)와 임계영(任啓英)이 호남 의병을 이끌고 있었는데 이들로 하여금 빨리 영남지방을 구원할 것을 촉구하고 체찰사가 이를 이행치 않을 때는 영호 두지 방을 버리고 전세를 회복치 못하는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합하께서는 이때의 중요성을 통찰하시어 국가를 지킨다는 근본적인 생각으로 양장(최, 임)에게 격문을 보내어 근왕의 행각을 중지시키고 선 조왕에게 주달하여 회복의 근기를 마련한다면 국가나 생민은 큰 다행일 것이다.

정유명(鄭惟明)은 강동 역골(薑洞嶧洞)에서 태어났고 성팽년(成彭年)은 황산서 출생하였으니 역골 뒤 용문산성(龍門山城)과 황산 뒤 호음산성(虎音山城)등이 이때 왜적에 대한 임전태세로 수축한 항거의 거점들이었으리라 생각된다.
2. 진주성의 수문장 오희남(모동리 무월 출신)의 최후
진주성의 마지막 싸움은 이듬해인 1593년6월21일부터 치열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때의 수문장이 향토출신의 용장 오희남이다. 그는 물샐틈없는 성문방어로 쳐들어오는 적을 얼씬도 못하게 막아내니 왜군들은 성문공격을 포기하고 작전을 바꾸었다. 5일이 지난 6월 26일에 이르러서는 인해전으로 성벽을 허물기 시작하였으므로 29일에 마침내 성이 함락되니 장군은 침입하는 왜군과 싸워 장렬한 전사를 하였고 그의 죽음에 이어 6만 성민(城民)이 모조리 옥쇄하였다.
이때 왜적은 전년에 있었던 진주성 대패를 복수할 목적으로 12만3천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왔으며 이에 맞선 우리의 장수는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등의 명장들이었다. 성문과 성벽을 범하다 못한 적은 성밖에 흙을 모아 언덕을 만들더니 그 위에 올라가 성중을 내려다보며 총을 난사하니 우리 측도 성내에 높은 언덕을 쌓았다. 이때 지휘관인 황진(黃進)이 의관을 벗어 던지고 몸소 지게로 흙을 나르니 모든 관민이 감동하여 하룻밤 사이에 토산을 만들어 토산 위에서 적진을 향하여 맹사하니 적은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튿날인 26일에는 적이 판자로 큰 궤를 만들어 그 속에 병졸들이 숨어 와서 성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성내에서는 큰 돌을 굴려서 그들을 분쇄하였으나 때마침 비가 내려 성벽의 돌이 허물어 성이 무너지려 할 때 최경회(崔慶會)는 한수의 서사시를 남기고 순절하였고 그의 애첩인 장수 출신(長水出身) 주논개(朱論介: 진주기생의암이)도 왜장 로꾸스게(毛谷村六助)의 목을 안고 남강 물에 몸을 던져 복수를 하였다.
수문장 오희남(吳希男)은 본면 모동리 무월(茅東里舞月) 출신으로 함양오씨 성재공(誠齋公)의 현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왜적과 항전하다가 서기1593년인 6월29일에 진주성 함락과 더불어 장렬한 전사를 하였으니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 2등에 봉하였고 헌종 때에 병조참의로 증직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