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천면 황산리 768번지 수승대 국민관광지 경내에 있다. 청송당 신복행의 강학지소로 서기1610년에 사라산 하복지에 친히 세웠던 것을 서기1987년에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겼다.
청송당 이건기
공의 성은 慎氏요 휘는 復行 자는 盛之 호가 聽松堂으로 본관은 居昌이다.
고려수사도 좌복야 시호는 恭獻公이요 휘는 修를 시조로 모시었다. 조의 휘는 友孟으로 승훈랑인데 부군께서 영암으로부터 이거 안음 황산에 정착하시었다. 고 휘 權은 즉 樂水先生이니 선생의 5남 1녀 중 3남으로 서기1533년 5월11일에 탄생하시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질이 정수하고 도량이 넓고 쾌활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기는 효성과 어른을 모시는 예절을 소학의 법도로 삼으셨다. 인근에 계시는 외숙 갈천선생 임훈에게 학문의 난의를 문의하시곤 하였다. 그 재질이 비범함을 아신 요수선생께서 과거에 나아가기를 권유하시었으나 공은 말씀하시기를 자신을 내세우고 이름을 얻는 것은 효도의 마지막이라 하시며 두문불출하시고 성리학탐구에 전념하시었다. 옥계노전이 관찰사로 있을 때 조정에 천하여 참봉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아우 휘 復振 호 夜川先生과는 정의가 유별하시어 앉으면 무릎을 맞대고 누우면 한 이불 밑에서 생활하시며 학문의 깊이를 항상 상의하시었다. 야천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형님의 학문의 깊이와 행실의 준행함을 가히 우리들이 어찌 측량할 수 있으리오. 문장과 덕망이 일세의 자랑으로 향당들이 존경하며 이에 따랐다. 중년에 이거 갈천지서 위수지북 사라산하 북상면 농산리하고 서기1610년 선생은 77세의 노령으로 재실을 짓고 뜰에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청송당이라 현판하시면서 자호로 삼았다. 또한 강학지소로 후인훈육에 일생을 다하셨다. 사후에 증직으로 사통정대부하여 선생의 품격을 추존하였다. 세태의 흐름에 따라 후손들이 향리를 떠나 재실의 유지관리가 어려워 종인이 상의하여 서기1987년에 수승대로 이건하면서 서기1966년에 세운 청송선생기적비도 담장 안으로 이건하였다. 서기1996년 월 일 12대손 철희 지음